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뉘 Nov 03. 2023

그대가 받았어야 할 편지 5

이름 불러주기

그대가 받았어야 할 편지 5




끝이 있어서

사랑이랄 수도 있는데,

괜한 웃음에다

눈을 반짝이는 때에

영원을 약속하려는 것은

사랑의 속성뿐 아니라

삶을 대강은 아는 탓일 테지요


수많은 단어를 써가며

사랑을 말하면서도

언젠가 사랑이

멈추리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 건,
서로 암묵적인 동의하에

사랑을 기만하기로

공모한 것과 같을 거예요

삶에 대해 불성실한 작가가

마지막 줄에, 그들은 그렇게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다며

끝을 얼버무리는 것과 같지요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사랑의 끝을 말해주고

그 끝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오늘의 당신이 내게 더욱

소중하다는 걸 말해줄 거예요


철없는 희망일지라도

혹시 끝이 없기를 바라도 좋잖아요


당신의 무엇에

내가 사로잡혔는지,

세상을 보는 눈빛,

세상에 뿌리는 미소,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삶을 사랑하게 만드는

당신이란 존재로서

나에게 베푸는 보시(布施), 아니면

커피잔을 잡은 당신의 오른손

새끼손가락, 아니면,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남 모르게 발끝을 비트는

당신의 발뒤꿈치 일 수 있어요


어쩌다가

당신을 보러 오는 길에 눈에 띈

당신과 비슷하지만,

당신일 수 없었던 행인 2

때문에 당신이 더욱

사랑스러울 수 있겠지요

벌써 몇십 년이나

영화와 티브이 속에서

타인의 얼굴로 사는

사람들을 보아왔던 덕분에

내 눈이 제법 높아진 것을

머릿속에 둔다면,

키이라 나이틀리나

크리스 헴스워스를 잊게 만드는

당신을 자랑해야지요

그들은 액자 안에

갇혀 있는 모습으로

우리의 시선을 가둔 채,

그 프레임 안에서만

그들을 바라보게 만드는 탓에

카메라 밖에서 보이는

평범함을 거부하는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모든 삶을 사소하게 만드는

흔한 평범함 속에서

자연의 필연 속에 있었고

진화론적 우연 속에 있었어요

그게 매력이란 걸 거예요

마치 내가 나 스스로

사랑한 것처럼

쓰고 있지만 말이에요


어쩌면 당신이 사랑인데,

당신으로 들어온 내 삶에

당신은 내게 할 만큼 했어요

더 하겠어요, 느닷없이

사랑이 끝날 때라면 모를까


그리고,

사랑하는 즐거움에 겨워

미리 말해 두는데,

사랑을 끝내는 건

그래야 할 때가 아닐 때

하기로 하지요

그렇게 할 수 있고,

그렇게 하는 게

사랑하는 이에 대한

예의일 테니까요

'사랑했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나도 그렇지만, 당신에게도

완벽에 대한

환상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 완벽이 애매한 건

완벽한 적이 없어서

어떤 것이 완벽인지를 모르는

인간이 추구하는

완벽이기 때문일 거예요


내가 하는 사랑도

뭐, 다르겠어요 다만, 나는

당신으로 인해

나를 완벽하게 만드는

사람이 실재한다는 환희를

'때때로' 즐기게 될 거예요

그게 착각이라 해도 말이지요


나아가, 사랑하지 않는 데는

나만 있어도 가능한 반면,

우리가 사랑하는 데는 비록

서로 사랑하지 않아도,

'내 마음 나도 모르게 만드는'

우리 자신이 있잖아요

사랑은 상대가

완벽할 지도 모른다는

자기 최면을 거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당신이 아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사랑하는 건 보여요, 혹시?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실망하진 않을 거예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건

당신 일이 분명하니까요












작가의 이전글 그게 당연한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