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 자신을 착취하고 있다.
한병철 작가님의 피로사회를 뒤늦게 읽었다. 철학책이지만 생각보다 얇아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책은 우리 사회와 나를 거울처럼 적나라하게 비추어 나의 가벼웠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끝이 없다.
그렇다. 좋게 말하면 자기계발과 이로 인한 성취에 끝이 없는 것이며, 나쁘게 말하면 자기 착취와 이로 인한 소진이 끝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취업을 위해 스펙을 쌓는 주위의 대학생들을 둘러보자. 나를 비롯한 그들은 한시라도 쉬지 않고 학점, 영어, 제2외국어, 시험 준비, 공모전, 대외활동 등을 쉴 새 없이 하면서 스스로를 주체에서 프로젝트로 전락시킨다. 물론 엄청난 경쟁 속에서 취업을 하기 위해 강제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사실은 누구에게 예속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것일 뿐이다. (물론 돈에 예속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도 자신의 이상을 위한 수단으로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어떤 예속적 본성을 지닌 주체가 아니다 그는 자신을 긍정화하고 해방시켜 프로젝트가 된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여기서 자학성이 생겨나며 그것은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 프로젝트는 성과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날리는 탄환임이 드러난다."
우리의 이러한 부지런함은 사실 어렸을 때부터 칭찬받아왔다. 그러나 이 부지런함은 자기 자신을 망각하려는 의지이며 도피일지도 모른다. 이 시대에는 타인에 의한 착취인 노예제도는 없지만, 성취에 대한 현대사회의 압박적 시선과 개인이 어릴 때부터 내재화된 부지런함은 스스로를 착취하도록 작동한다.
"너희의 부지런함은 자기 자신을 망각하려는 의지이며 도피다. 너희가 삶을 더 믿는다면 순간에 몸을 던지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내실이 부족해서 기다리지도 못한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또한 공부나 일에서만 부지런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쉬거나 노는 것에서도 부지런함과 분주한 활동성을 발휘하곤 한다. 지하철에 타면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되는 1시간 내외의 시간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게임, 인터넷 그리고 SNS에 열중하면서, 깊은 사색에게는 결코 시간을 내어주지 않는다. 게다가 놀 때에도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온 자신에 대한 보상심리인지 술, 클럽 그리고 보여주기 식의 무리한 여행 등을 통해 더욱 분주하게 자신을 소진시킨다.
"활동성이 첨예화되어 활동 과잉으로 치달으면 이는 도리어 아무 저항 없이 모든 자극과 충돌에 순종하는 과잉수동성으로 전도되고 만다는 것이 바로 활동성의 변증법이다."
"소진Burnout은 자주 우울증으로 귀결되거니와 이때 우울증을 유발하는 원인으로는 오히려 과도한 긴장과 과부하로 파괴적 특성까지 나타내는 과잉 자기 관계를 들 수 있는 것이다. 탈진과 우울 상태에 빠진 성과주체는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 의해 소모되어버리는 셈이다."
특히 소셜 네트워크를 피로사회와 우울사회를 통해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도 흥미로웠다. 우리는 카카오톡의 수백 명의 친구중에서 친밀한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물과 이를 통해 얻는 누군가의 '좋아요'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소셜 네트워크 속의 '친구들'은 마치 상품처럼 전시된 자아에게 주의를 선사함으로써 자아 감정을 높여주는 소비자의 구실을 할 따름이다."
SNS야 말로 성과사회의 진면목을 더 세밀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고 한다.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 작가는 이것들이 만연한 자기착취의 피로사회를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카토의 말을 빌려 제안한다.
"겉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보다 더 많은 활동을 하는 때는 없으며, 홀로 고독에 빠져있을 때만큼 덜 외로운 때도 없다."
- 카토-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배움의 목표는 니체에 따르면 '고상한 문화'이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신의 부재,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성격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작가는 이처럼 깊은 심심함과 보는 법의 교육이 현대인에게 필요하다고 본다.
작가의 대안이 반드시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어느 정도 공감이 될 뿐이다. 깊은 심심함은 사실 1인 가구와 피상적인 인간관계가 만연해지면서, 현대인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어느 정도 다들 갖추게 된 역량 아닌가? 이처럼 깊은 심심함을 이미 갖춘 사람들에게 작가의 제안은 조금 애매하게 들리는 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물론 너무나 과한 자극과 피로 속에 파묻힌 사람들에게는 작가가 권하는 대안이 효과적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