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23일의 하루
병원에서 일하다보면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교수님, 선생님, 동기들 그리고 후배들과 부대끼게된다. 하루종일 한 공간에서만 지내게 되니 사람들의 다양한 면을 많이 보게 된다. 특히 우리는 치과병원이라 단순히 쳐다만봐서는 쉽게 보기 힘든, 협소한 구강 내 공간을 뚫어져라 보다보니 더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사람이 꽤 있다. 어디서 머리 좀 좋다는 말을 들으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다보니 그 좋은 머리를 정치질에 이용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앞서 말한 사람들 때문에 지쳐서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냐며 점점 둥글어지는 사람도 있다. 나는 굳이 분류하자면 마지막 부류에 속한다.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보며 이 사람은 왜 그럴까, 저 사람은 왜 그럴까 의문스럽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래 저 사람이니까 또 저러네.’로 내 생각이 도착되곤 했다.
그런 내게 최근에 마음에 품고 지내는 사자성어가 생겼다. 어느 순간부터, 어떤 계기로 그렇게 된건지 모르게 그냥 내 머릿 속에 스며들었다. 이런 게 좌우명이라도 되는 걸까. 바로 ‘타산지석他山之石’이다. 타산지석은 시경의 소아편에 있는 학명이라는 시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자 그대로는 다른 산의 돌인데 다른 산에 있는 쓸모 없어 보이는 거친 돌을 숫돌로 삼아 옥을 간다는 시 구절이 있다. 다른 사람의 하찮은 말이나 행동도 자기의 수양에 도움이 된다는 의미로 쓰인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자성어이기도하고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던건 분명한데, 요즘 다른 사람들을 보며 내 일상 하나하나에 비추어보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얼마 전 임플란트 수술실이었다. 인수인계 기간이라 일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은 후배랑 같이 어시스트를 서게 되었다. 현재 우리의 단계를 거쳤던 자신의 옛날 모습이 까마득할 레지던트 3년차 선생님이 술자로 서셨다. 선생님은 이따금씩 엑스레이 사진으로 고개를 돌릴 뿐 환자 입 안에 집중하느라 예민해질 수 밖에 없는 상태셨다. 그러던 와중에 우리 후배는 어땠을까. 당연히 허둥지둥하느라 바빴다. 미리 술식 기구 준비를 다 해놓았지만 환자 상태에 따라 더 필요한 것들이 생겨났고 기구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니 당연했다. 수술실 안에 있는 기구를 찾으러 밖으로 뛰쳐나가는 뒷모습을 여러 번 보게 되었다. 답답하기도 했지만 1년 전의 내 모습이 생각나 짠하기도 했다. 레지던트 선생님은 달랐다. 너무 답답한 나머지 깊은 한숨과 함께 가슴을 내려치기도 했다.
“저도 작년엔 저랬겠죠?”
“..... 그러게요. 저도 저런 때가 있었겠죠.”
내 조심스런 말에 선생님이 대답하기까지 흘렀던 저 정적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처음이라 버벅댈 수도 있지.’ 라는 생각보다 ‘쟨 왜 저렇게 못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앞섰던 거겠지. 선생님의 생각도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수직적 위계질서의 위쪽으로 가까워질수록 자신이 이미 겪었던 어려움들은 다 잊혀지는걸까 하는 의구심이 내게 남았다. 그 날의 기억을 타산지석 삼아서 나는 항상 오늘의 나를 기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올챙이를 기억하는 개구리가 되어야겠다. 나도 사람이니 실수한 적이 있었을테고, 다른 사람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상대의 실수를 한 번 정도 더 눈감아주는 관용을 베풀어야겠다. 예민하고 깐깐한 선생님의 산에서도 돌을 찾을 수 있었다.
예전이면 한 번 투덜거리면서 넘어갔을 타인의 흠에서 요즘은 자기반성의 계기를 찾는다. 후배들을 보면서 어떻게 해야 윗 사람들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한다. 후배들을 대하면서 어떻게 해야 나는 좋은 선배,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할 때는 내 위의 레지던트 선생님을 보면서 다른 산의 돌을 찾는다.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 매번 정치질 하는 사람 등 이해가 되지 않던 나와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도 이제 저들에게서 배울 점을 찾는다. 좋은 점은 보고 내 것으로 만들고, 나쁜 점은 내가 지양해야할 대상이 된다. 그렇게 나를 성숙시키고자 한다. 세상의 돌을 모아 나의 옥을 갈아내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