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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초 Jan 16. 2024

엄마 4년, 워킹맘 3년차의 소회

2020년 1월 엄마가 된 지 만 4년이 됐다(정확히는 아직 1주일하고 며칠 더 남았다). 그리고 올 봄이 되면 복직한 지 만 3년이 된다.     


요즘은 자녀 한 명을 키워 웬만한 사회인으로 독립시키는 데 평균 30년은 족히 걸린다고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40년도 걸리고 혹은 그 이상 걸리기도 한다. 기껏 다 키웠더니 손주를 봐 줘야 해서 평생 돌봄의 굴레에 묶이기도 한다. 그런 시대니 겨우 4년 엄마 노릇 하고 무슨 소회 씩이나 밝히는 걸 귀엽다고 하실 분들도 계실 것 같다.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그냥 귀엽게 봐 달라. (다만, 훈계는 마음 속으로만 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엄마가 되고 나서 1년차 2년차 3년차 다 달랐지만 올해는 확실히 체감하는 느낌이 다르다. 일례로 나는 아이를 낳고 나서 지난 4년간 다이어리를 쓰지 않았다. 파워 ‘J’라서 계획하는 것도 좋아하고 기록하는 것도 참 좋아하지만, 아이를 키우면서는 다 무의미할 것 같다는 생각에 출산을 앞둔 2019년에는 다음 해 다이어리를 사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브런치에 글도 남겼다). 


그리고 역시나, 육아의 고통은 상상 그 이상이라서 다이어리는커녕 먹고 자고 씻고 싸는 것조차 내가 원할 때 할 수가 없었다. 육아휴직을 하면서 유달리 예민한 아기를 아기띠에 매고 하루 종일 (제대로 누워서 자는 건 하루 평균 2시간 정도였던 듯) 서서 시간을 보내고, 직업상 이틀에 한 번 집에 들어오는 남편을 기다리며 하루에 한두 끼 정도 냉동 도시락이나 빵쪼가리 등을 서서 허겁지겁 먹고, 남편이 오면 그제서야 씻고 병원에 갔다. 병원에 가서 난생 처음으로 먹는 정신과 약을 받아와 입에 털어넣고 또 아이와 고군분투했다. 코로나 때라 밖에도 잘 못 나가다가 그나마 아이가 8개월이 넘어서 공원이 많은 동네로 이사와 유모차에 태우고 무작정 밖으로 돌아다니기도 했다. 물론 아기띠도 함께 가져가서 아이가 울면 안고 다른 손으로 빈 유모차를 밀고 다녔다. 오후 4시에 포장마차에서 핫도그를 꾸역꾸역 먹으며 그 날의 첫 끼니를 때웠다(스트레스 받으면 살이 찌는 체질이라, 이렇게 살아도 살은 빠지지 않았다).    

 

1년 휴직을 하고 복직을 했더니 이번에는 회사에서 나가라고 눈치를 줬다. 후배한테 모든 권한과 일거리를 다 주고 내가 빠진 단톡방이 만들어졌다. 나 역시 ‘경력 단절’이라는 뻔한 엔딩을 맞게 되나 싶던 찰나 다행히도 친하게 지나던 업계 동료가 자기 회사로 오라고 해서 육아휴직 사후지급금을 받고 바로 이직에 성공했다. 전에 다니던 직장보다 규모도 업계 위상(?)도 약간 낮긴 했지만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복직하고도 2년간은 ‘쉴 틈이 아예 전무한 삶’에 대해 적응이 되지 않아 힘들었다. 내 주변의 어린 아이 워킹맘들은 다들 “이렇게 힘든 게 맞냐”며 혀를 내두른다. 일반적인 직장인들은 그래도 퇴근 후와 주말에 재충전을 통해 다시 일할 기운을 회복하는데 워킹맘에게는 그런 시간 따위 전혀 없다. 심지어 연월차조차 아이가 아프거나 방학 등에 써야 하기 때문에 나를 위해 쓸 수 없다. 아이가 아프면 급 연차라도 내야 하지만 내가 아프면 열이 40도에 육박해도 약을 먹고 출근해야 하는 삶이 미치도록 서러웠다. 누적된 정신적 육체적 피로는 퇴근 후 아이를 재우고 나서 몸에 좋지 않은 맵고, 짜고, 느끼하고, 단 음식을 폭식하면서 풀었다. 풀었다기보단 사실 억누른 것에 가까웠다. 당연히 숨쉬기 운동도 제대로 할 틈이 없으니 몸무게는 날로 더 늘어났고 출산한 지 수년이 지났는데도 임부복을 졸업하지 못했다. 건강검진을 가면 깨끗하던 내가 듣도보도 못한 이상소견을 수두룩하게 받기 시작했다.     


지난 엄마로서의 4년, 워킹맘으로서의 약 3년간은 사실 ‘사는 즐거움’이라는 걸 거의 몰랐던 것 같다. 그래도 남들은 힘들어도 아이가 웃는 걸 보면 너무 행복하다는데, 아이랑 노는 게 너무 즐거워서 둘째도 낳고 싶어진다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냥 의무감에 짓눌려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에 가까웠다. 그래도 내가 낳은 아이는 최선을 다해 돌보고 빈자리를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 퇴근 후와 주말도 꼭 필요한 게 아니면 되도록 아이와 함께했다. 아이의 월령에 맞는 놀이와 활동을 해 주고 일을 빨리 끝낼 수 있으면 칼같이 뛰어가 아이를 직접 하원시킨 후 놀이터까지 따라갔다. 내향적인 성격에 놀이터에서 동네맘들과의 대화가 어색했지만 그래도 외향적인 아이의 니즈에 맞춰서 열심히 어울리려고 노력했다. 진짜 컨디션이 나빠 죽을 것 같으면 그냥 아이 옆에 누워서 말상대라도 해 주려고 했다. 방학에는 부부 연차를 탈탈 털어서 아이와 함께 여행을 다니고 혹은 재택근무를 하면서 아이와 함께 집에서 뒹굴거리기라도 했다. 엄마가 일을 한다는 이유로 ‘방학도 없이 등원하는 천덕꾸러기’가 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가 만4세가 된다. 아직 한국식 세는 나이밖에 이해를 못 하는 우리 아이는 올해부터 손가락을 쫙 펴며 “5살 형아”라고 말한다. 물론 누군가가 지켜봐야 하긴 하지만, 아무튼 이제 아이는 시시각각 누군가가 놀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놀잇감을 찾아서 잘 논다. 혼자 바지를 내리고 쉬를 하고, 옷을 벗고 옷장에서 옷을 찾아서 혼자 입기도 잘 한다. 자조가 늘어서 아이를 봐줄 사람에게 예전처럼 그렇게 미안하지는 않다. 어른처럼 말을 잘 하게 돼서 다른 사람에게 잠시 아이를 맡겨도 막 불안하지 않다. 육아서에서도 36개월 이후부터는 엄마가 눈 앞에 없어도 엄마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기에 나는 이제 조금씩 나의 시간을 찾아가고 있다. 퇴근 후에 남편에게 맡기고 교대로 운동을 다녀올 수도 있게 됐다. 아이가 스스로 누워 잘 자기 때문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상대적으로 여유롭게 출근 준비도 가능하다. 올해는 다이어리도 조금씩 기록하기 시작했다. 작년 하반기부터는 출퇴근길에 전자책으로 책도 읽고 신문도 읽는다. 복직 초기에는 정신적 여유가 하나도 없어서 출퇴근 길에도 밀린 잠을 청하거나 그냥 오락적인 영상만 멍하니 봤던 것 같다. 이제는 비로소 일과 육아 말고도 생산적인 무언가를 할 여력이 생긴다. 이제야 아침에 일어나면서 한숨이 나오지 않는다.     


아직 아이와 함께하는 매 순간이 행복하기만 하고 그렇지는 않다. 다만 ‘할 만하다’고 느끼는 시간의 비중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남편의 직업 특성상 주말 중 하루는 온전히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은데, 전에는 생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혔던 이런 날들이 이제는 그럭저럭 지낼 만하다. 그래서 많은 부모들은 아이가 이 나이쯤 되면 둘째를 가져서 다시 신생아 육아의 뜨거운 맛을 되풀이하던데, 나는 아직 그럴 결심까진 안 서지만, 그래도 대략 사람 꼴을 하고 지낼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얼마 전 아이 겨울방학 날에 연차를 내고 단 둘이 만화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다. 영화 상영 전 푸드코트에서 밥을 먹는데 아이랑 대화를 하면서 음식을 기다릴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게 느껴졌다. 사실 그 푸드코트는 수 년 전 아이가 돌도 지나지 않았을 때 유모차에 태우고 무작정 밥을 먹으러 갔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돌도 안 된 아기는 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예 없었으므로 나 혼자 메뉴를 시켜 꾸역꾸역 흡입을 하고 아기는 혼자 놀다가 울음을 터트려 헐레벌떡 일어났던 기억이 난다. 아마 그 때의 식사도 아마 그 날의 유일한 끼니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처럼 자리를 잡고 앉아 엄마랑 밥을 나눠먹고 제 손으로 식기를 들고 식사를 한다. 심지어 음식이 나오려고 해서 내가 일어나려고 하니 아이가 “아냐 저건 다른 집 거야”라고 지적까지 해 주셨다.(실제로 다른 사람들이 음식을 받아 가자 “거 봐 내 말이 맞잖아”라고도 덧붙이셨다.)     


아이가 어릴 땐 영원히 이 정도의 자유도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물론 아이가 아예 없었을 때와 같은 삶은 아마도 앞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슬프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사실 삶의 매 순간은 단 한 번도 같을 수 없다. 고백하자면 아이가 태어나고 몇 년 간은 엄마가 된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한없는 사랑과 행복만으로 육아를 하기에 나는 너무 냉정하고 이기적이라서, 내가 나를 너무 몰랐다 싶었다. 그러나 이미 태어난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고, 마음을 다해 행복하지 못하니 물리적인 시간이라도 최대한 채워보자 하다 보니 어느새 아이는 자라고 나의 일상도 점점 정상화되고 있다. 


물론 지금의 행복은 아이 4~7세경 반짝 찾아와 엄마를 착각하게 만든다는 육아의 황금기이고, 초등 입학과 함께 다시 ‘전쟁’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아직까지 나의 육아 난이도는 지속적으로 우하향해왔다. ‘재접근기’도 딱히 심하지 않았고, ‘미운 네 살’도 신생아 때의 못 자고 못 먹고 못 싸는 고통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아이가 어릴 때 고군분투 중인 내게 “지금이 그나마 제일 편할 때고 앞으로는 점점 더 힘들 일만 남았다”고들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게 학령기 이후를 말하는 거라면 몰라도 아직까지는 크게 공감되지 않는다. 다들 아기 어릴 때가 미치도록 그리워질 거라고들 했지만, 나는 그때만 생각하면 살이 떨릴 정도로 미치도록 힘들었던 기억만 나서 떠올리지 않게 된다.


여기까지 지난 4년간의 소회를 되돌아봤다. 오랜만에 한 번 주절거리고 싶어서 글을 써 봤는데, 알고는 있었지만 나 참 고생 많이 했구나 싶다. 그리고 옆에서 나만큼이나 일과 육아로 고군분투한 남편에게도 감사하다. 그리고 여러모로 부족한 부모임에도 밝고 건강하게 잘 자라온 우리 아이에게도 언제나 감사한 마음뿐이다. 그렇게 말하기 좋아하는 아이가 장장 28개월동안 말 한 마디 제대로 못 하면서 얼마나 답답했을지 싶다. 너도 참 크느라 고생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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