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뚜벅초 Aug 29. 2024

서른이 되면 세상이 끝날 줄 알았다

사진출처 : pexels


오래된 블로그에서 무려 2011년에 쓴 일기를 발견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진로가 명확하지 않아 착잡했던 25살의 내가 쓴 글이었다.
첫 줄부터 피식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5년만 더 있으면 좋은 시절 다 갔다는 서른이 된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녀석 오버가 심하네, 할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때의 시대상을 감안하면 아주 지나친 말도 아니었다.
여자 나이 크리스마스 케이크와 같다는 농담이 일부 몰상식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통되기도 했고
서른이 갖는 사회적 인식과 가치가 지금과는 사뭇 다를 때였다.
새삼 한국 사회가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실감케 하는 문장이기도 했다.

다음 문장을 읽어내려갔다.
"지금 이 대로 번듯한 직장에도 취업 못 하고 그냥 원치 않는 일이나 하며 재미없게 살다가
먹고살기 힘들어지면 쫓기듯 결혼을 선택하게 될까봐 무섭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서른에서도 (만 나이 기준으로도) 7년이나 더 먹은 지금의 시점에서
다행히도 나의 30대는 25살의 내가 우려했던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때 나쁘다고 생각했던 게 꼭 나쁘지만은 않았고,
좋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어쩌면 그렇게 좋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나와 내 주변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일들로
나의 가치관이 너무 많이 바뀌었고, 사회 또한 크게 바뀐 영향이다.

다행히 (그 때는) 원했던 분야에 합격해서 지금까지 일하고 있고
먹고살기 힘들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결혼했고
(그때는 많이들 그래서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듯이) 결혼과 함께 경력이 중단되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면 내가 사회 초년생이었던 2010년대 초중반만 해도,
공직이 아니면 30~40대 기혼 여성을 거의 구경하기 어려웠다.

더 재밌는 점은
내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더 정확히는 주변에서 그렇게 열심히 세뇌시켰던
'20대는 인생의 최고 전성기'라는 말이
적어도 나에게는 별로 해당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장 빛날 때라던 20대는, 나의 경우 생활고와의 싸움이었다.
강남 아파트 살 돈이 없는 그런 돈 없는게 아니고
진짜로 당장 점심값이 없어서 배고픔을 참고 집까지 걸어갈 때도 많았다.
친구들과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통장 잔고가 700원밖에 없어서 안절부절할 때도 있었다.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하기 어려웠고 어떻게 구했다 쳐도 시급이 무려 2천원대였다.(잘 주는 게 4천원대 정도)
가정 형편이 위태로웠기 때문에 엄마 아빠 카드 찬스를 요청하는 것도 염치없었다.
돈이 없으니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고 시간은 남아돌았지만 할 게 없었다.
숫기가 없어서 친구도 적고 남자친구도 없어서 특별한 날만 되면 위축됐다.
20대는 공부도 연애도 꾸밈도 여행도 모두 멋지게 해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감이 언제나 무거웠다.

반면 나의 30대는 비록 나름의 고충은 있지만 20대에 비하면 훨씬 낫다.
다이어트와 미용에 대한 부담감도 내려놓았고
진짜로 돈이 한 푼도 없어서 끼니를 거를 일도 없다.
남편과 자녀가 있으니 인간관계에 연연할 필요도 없고 오히려 혼자 있는 시간을 따로 내야 할 정도다.
  

아이가 어릴 때가 최고 행복할 때라고들 한다.
그 말에 아예 공감이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일과 양육을 병행하면서 내 시간이 전혀 없이 달리는 삶이 때론 버거울 때가 많다.
그럼에도 어딘가에 하소연이라도 할라 치면
'그때가 제일 행복할 때야, 지금을 즐겨, 나중에는 눈물나게 그때가 그리워질걸?'이라는 말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생각해 보면 나의 20대도 비슷했을 것 같다.
청춘의 고난과 혼란을 이야기하면 '그래도 그때가 제일 행복할 때야. 나는 너만한 나이면 소원이 없겠다' 고들 했겠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나는
아, 지금이 '그나마' 가장 좋을 때구나. 서른 되면 이보다 더 비참하고 불행해지는구나.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지금이 최고라고 생각해야겠다. 근데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 무섭고 두렵다...라고 했을 것 같다.


물론 나의 미래는 정말
지금이 눈물나게 그리워질 정도로 힘들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행불행의 기준은 다 나에게 있으며
다른 사람이 재단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나이듦에 대해 사회적인 관용과 긍정적인 시선이 점차 늘어나는 게 반갑다.
적어도 요즘은 '여자 나이 서른 지났으면 좋을 때 다 갔다'라는 식의 경솔한 발언을 듣기 어렵다.
아니 애초에 다른 사람의 나이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이
최소 실례라는 것쯤은 어렴풋이 알고 있는 시대이니까.
나는 나의 20대보다 지금이 좋다.
그리고 남들이 아무리 낭만이라고 미화해도, 말도 안 되는 비합리가 판치던 수십 년 전 사회보다는
차라리 지금 시대가 더 나은 것 같다(비록 그렇지 않은 부분도 많지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