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구름이 말했지 이 또한 지나간다고

by 뚜벅초

혹한기가 지나고 드디어 야외에서 달리기를 할 수 있는 계절이 왔다. 미세먼지가 심하지 않은 날에는 아침 일찍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집 밖으로 나선다. 러닝머신만 달릴 때보다 훨씬 빨리 숨이 가빠오지만, 야외 러닝만이 주는 즐거움이 있다.

천장이 달려 있는 피트니스 센터의 러닝 머신 위에서는 매일 똑같은 풍경만을 보며 달릴 수밖에 없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과 비슷한 운동을 하는 다른 사람들만이 보일 뿐이다.

그러나 야외 러닝 중에는 모든 것이 조금씩 바뀐다. 매일 똑같은 코스를 달려도 그곳은 결코 똑같지 않다. 어제는 빈 가지였던 나무에 새순이 돋기 시작했고 땅에는 이름 모를 풀꽃이 삐쭉 마중을 나와 있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사람들도 매번 다르고 코끝을 스치는 바람의 온도와 습도도 시시각각 다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구름들이 지나가고 있다. 구름이야말로 매일, 매 시간, 매 분, 매 초 모습을 달리한다. 어디론가 바쁘게 사라지기도 하고 신기한 색으로 빛을 내기도 한다. 때로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먹구름으로 몰려와 곧 비가 올 것임을 예고하기도 한다. 어이쿠, 오늘은 우산을 챙겨야겠군.


구름이야말로 이 땅의 삼라만상이 모두 영원하지 않음을 알려주는

모든 것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존재임을 알려주는 가장 확고불변한 스승이다.




몇 년 전 스마트폰 명상 어플리케이션에 푹 빠져 살 때가 있었다. 다양한 상황에 맞춰 명상 가이드를 전해주는 앱이라 초심자에게는 딱 좋은 입문 교과서와도 같았다. 명상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뒤에는 가이드가 없는 편이 몰입에 더 낫지만, 초보자에겐 적절한 가이드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잡생각만 잔뜩 하다가 꾸벅꾸벅 졸고 말 테니까.


그 날은 개인적인 고민으로 머릿속이 무척 복잡했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걷는 것이 최고다.

양 귀에 이어폰을 꽂고 명상 어플리케이션을 재생한 채 무작정 동네를 걸어다녔다.

앱에서 나온 명상 가이드 멘트 한 마디가 귓전을 때렸다.


"지금 당신의 앞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세요. 50년이 지나면, 이 중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 없을 겁니다. 100년이 지나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났을 겁니다."


지금도 다양한 일들로 바삐 어디론가 발걸음을 재촉하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복잡한 머리로 거리를 하염없이 걷는 나.

이 모든 사람들 중 상당 수는 수십년 뒤 이 세상에 없다.

사실은 내일을 살 수 있을지조차 100% 장담할 수는 없다.


내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 또한 50년 뒤, 100년 뒤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문제다.

그리고 나도 사라지겠지.

내가 미워하는 사람,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 모두 수십 년 후에는 이미 기억에조차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한결 가벼워진 머리로 집에 돌아갔다.




해가 뜨고 있는 아침 하늘 아래에서 걸음을 멈추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이 천천히 모습을 바꾸며 바람을 타고 사라져간다.


세상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놓으라고 성화를 부린다. 끊임없이 자격을 묻고 증명을 요구한다. 준비 기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노력의 시간을 한심한 모습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미친 듯이 달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큰 일이 날 것이라고 협박을 하는 목소리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도 여전히 끝나지 않는 앞날에 대한 고민들.


그런데,

결국 모든 것은 변하고, 지나갈 거잖아. 구름처럼.


십여 년 전에도, 이십여 년 전에도 똑같은 패턴의 감정이 오고 갔다. 고민의 세세한 내용은 다르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간관계, 연애, 취업, 경제적인 어려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는 배경, 황야에 홀로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외로움, 남들에 비해 한참 뒤떨어져 버린 것 같은 낙오감.

와중에 겉으로 보여지는 것으로만 나를 판단하고 쉽게 조언인 척 충고를 해대던 사람들, 그렇게 살면 큰 일이라도 날 것처럼 성화를 부리던 다양한 목소리들.


그러나 많은 일들이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저절로 해결됐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길의 풀꽃들처럼 내 몸을 구성하는 세포처럼 나라는 사람도 계속 달라졌기에 과거에 문제였던 것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됐다.

수만 번의 밀어내기에도 바윗돌처럼 꿈쩍 않던 것들이 어느 순간 가볍게 밀려나기도 했다.


지금의 문제 또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 하게 될 수도 있고, 안 하게 될 수도 있다. 우연한 기회로 전혀 다른 일을 할 수도 있고, 그 일은 잘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안 되어도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모른다.


세상살이가 자꾸만 두려워지는 나는 그래서 구름을 보고 다시 괜찮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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