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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녀부장 Jun 02. 2023

출퇴근 거리는 편도 10km 이상

6월이다. 밤바람에서 냉기가 사라지고, 여름향이 나기 시작했다. 오래된 CD들을 꺼내본다.


회사의 신규 프로젝트가 새끼를 치듯이 늘어났고, 그 많은 프로젝트 중에 내가 속해 있는 것들이 많았다. 이제 막 중간관리자로 승진해 프로젝트 실무를 이끌며 팀원들 다독임도 내 몫이던 시절이었다.

이어지는 야근에 매일 아침 피곤이 가시지 않은 상태로 출근했다. 충분히 똑똑해지지 않은 상태로 급한 업무들을 쳐내고 나면 눈이 반짝 떠지는 점심시간. 생기 넘치는 점심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가고, 화장실 가는 것도 잊고 일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퇴근 시간이었다.


슬슬 고민이 시작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회사 캔틴에서 어수선하게 늘어놓고 먹는 중국음식은 정말 별론데...하지만 조금이라도 일찍 회사를 나서겠다는 생각에 가장 빠른 배달음식으로 타협하고 만다. 야근러들과의 소소한 농담과 아이디어 회의가 버무려진 저녁식사는 순식간에 끝난다. 그리고는 이 일, 저 일 하다보면 눈이 슬슬 무거워지는 시간. 하~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접자. 퇴근을 해야지 다시 출근을 하지. 다시 조금은 신이 나는 시간이다.

때는 초여름, 차 창문을 내리면 낮의 열기를 날려버린 시원한 바람이 밀려들어온다. 유리창을 반쯤 내리고 운전석 시트에서 비트가 느껴질 정도로 크게 음악을 틀어놓고 달리기 좋은 날이다. 자동차 콘솔박스에는 케이스 없는 CD가 여러장 있다. 각각의 CD에는 그 안에 담겨있는 곡들의 무드를 설명해주는 짧은 문구가 네임펜으로 적혀있다. 그 밤 나의 기분, 나를 둘러싼 공기에 어울리는 CD를 자동차 CD 플레이어에 꽂고 늦은 퇴근 길 드라이브를 시작한다. 이 시간 덕분에 잦은 야근도 견딜만 하다 생각한다.


내 생활반경이 너무 짧아 겨우 4곡만에 불량스러운 드라이브가 끝났지만 내 짧은 일탈의 시간을 더 달콤하게 만들어주던 그 음악들. ‘출퇴근길이 편도 10km는 되어야겠구나’생각했다. 한 움큼씩 챙겨먹는 비타민 없이도 쌩쌩하던 그 시절, 퇴근 길 나의 비타민. 음악을 좋아하던 회사선배가 때때로 만들어주던 음악CD였다.

선배가 그렇게 후배들에게 영혼의 비타민을 챙겨주던 그 시절. 직장 상사로 만나, 따뜻하고 참 좋은 선배로 항상 곁에 계시던 분. 내가 뭔가 어려운 결정을 해야할 때면 언제든 망설임없이 전화할 수 있었던 분. 절인 배추가 되어 퇴근하던 시절, 남다른 감각으로 엄선한 음악CD로 나의 무덤덤한 퇴근 길을 풍요롭게 채워주시던 분. 그해 6월...너무 갑자기 떠나버리셨지. 그리고 이제는 거실 오디오에서 가끔씩 재생되는, 케이스 없는 CD로 문득문득 추억되는 참 좋았던 선배.


어김없이 6월이면 급하지도 않은 업무들을 펼쳐놓고 야근하고 싶어진다. 짧은 야근 후엔 한적한 도로를 달리며 차창을 열고 오디오 볼륨도 한껏 올려본다. 그러다 이내 볼륨을 줄이고, 스윽 창문도 올려 버린다.


더 이상 예전처럼 신나지가 않아. 이제는 차 오디오에 CD 플레이어도 없고, 콘솔 박스에 케이스 없는 CD도 없다. 잠시 시무룩해하다가 생각해본다. 나는 어느 한 순간이라도 후배들에게 그런 따뜻한 기억을 심어준 적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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