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바다의 마음, 브랜드의 처음>을 쓰신 임태수 작가님의 북 토크를 들었다. 행사 마지막 자락쯤 몇 권의 책을 추천해 주셨고 다음 날 집 근처 알라딘으로 달려갔다. 운이 좋게도 새 것과 다름없는 상태의 세 권의 책을 반 값에 구매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읽기 시작한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What I talk about When I talk about Running)'. 대단한 이유는 없고, 제목이 귀여워서. 개구쟁이처럼 "있잖아 내가 할 말이 있어!" 라며 높이 손을 들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상실의 시대로 하루키에 입문했지만, 실은 그의 소설보다 에세이를 더 많이 읽었다. '먼 북소리'와 '소설가의 일'은 가장 좋아는 에세이다. 특히 '소설가에 일'에는 열 장 걸러 한 장 꼴로 밑줄 그은 문장을 찾을 수 있을 정도. ‘대체 왤까?’ 이번 책을 읽으며 생각해 봤다. 또 바뀔 수 도 있는 생각이라 부끄럽지만, 하루를 보내고 내게 남은 어떠한 감정이(대게는 기쁨과 슬픔이) 정리되지 않은 '느낌'으로 내 몸속을 유영할 때. 매일 밤 일기장에 뭉글하게나마 어떠한 형태로 빚어 보지만, 비로소 하루키의 문장을 만나 완벽히 소화되는 경험을 했던 것 같다. 감히 말하자면 살아가는 방식이 닮은 것 같다.
'자, 그래 그럼 들어보자!' 첫 장을 넘겼고 빠른 속도로 빠져들었다. 갈수록 한 장 한 장이 소중해지더니 마지막 장을 덮을 땐 확신할 수 있었다. 한 번 읽고 말 책은 아니라는 것.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달리기, 그 이상의 것이었다. 왜 달리는지, 아니 왜 사는지. 다분히 철학적이지만 별나라 이야기처럼 어렵지 않다. 스스로와의 싸움을 꾸준히 해 나가는 '소설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달리기가 어떤 의미인지 좀 더 현실적인 레벨에서 이야기한다. 덕분에 내 삶의 방식과 비교해 볼 수 있었다. 특별히 고마웠던 문장들이 있어 적어본다. 무겁기도, 가볍기도 한 문장들이다.
P. 39 지극히 상식적인 말을 하는 것 같지만,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있고 그것으로는 세계는 성립되어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의 가치관이 있고,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이 있다. 나에게는 나의 가치관이 있고,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이 있다. 그 결과 까닭 없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오해를 받거나 비난을 받거나 하는 일은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 때문에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그건 괴로운 체험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와 같은 괴로움이나 상처는 인생에 있어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이다.라는 점을 조금씩 깨닫게 되어있다. 생각해보면 타인과 얼마간이나마 차이가 있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자아란 것을 형성하게 디고, 자립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유지해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나의 풍경 속에 타인과 다른 모습을 파악하고, 타인과 다른 것을 느끼며, 타인과 다른 말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님으로써, 나만의 이야기를 써나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내가 쓴 것을 손에 들고 읽어준다는 드문 상황도 생겨난다. 내가 달느 누구도 아닌 '나'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마음이 받게 되는 아픈 상처는 그와 같은 인간의 자립성이 세계에 대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당연한 대가인 것이다.'
P. 128
같은 10년이라고 해도, 멍하게 사는 10년보다는 확실한 목적을 지니고 생동감 있게 사는 10년 쪽이, 당연한 일이지만 훨씬 바람직하고, 달리는 것은 확실히 그러한 목적을 도와줄 것이고 생각하고 있다.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키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 쓰는 것의) 메타포 이기도 한 것이다.
P. 173
그러나 걷지 않는다. 나는 걷기 위해서 이 레이스에 참가한 건 아니다. 갈리기 위해 참가한 것이다. 그 때문에 - 그 목적 하나를 위해- 비행기를 타고 일부러 일본의 북녘 끝까지 날아온 것이다. 아무리 달리는 스피드가 떨어졌다 해도 거을 수는 없다. 그것이 규칙이다. 만약 자신이 정한 규칙을 한 번이라도 깨트린다면 앞으로도 다시 규책을 깨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레이스를 완주하는 것은 아마도 어렵게 될 것이다.
P.175
끝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우선 한 단락을 짓는 것뿐이므로, 실제로는 대단한 의미가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끝이 있기에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존재라는 사물의 의미를 편의적으로 두드러지게 보이기 위해서, 혹은 또 그 유한성의 에두른 비유로서 어딘가의 지점에 다른 일은 젖혀놓고 우선 종착점이 설정되어 있을 뿐이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P. 186
솔직히 말해서, 나로서는 잘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와 경위로서 '러너스 블루'가 내 몸에 배어 있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이유와 경위로서 지금 그것이 희미해지고 사라지려 하고 있는지. 그 설명은 아직 잘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어쩌면 결국에는 이렇게 단정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마 인생이 아닐까.라고. 우리는 아마 그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 송두리째, 이유도 모른 채 그 어떤 경위에도 아란 곳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고, 세금이나 조수의 간만, 존 레넌의 죽음과 월드컵이 오심과 마찬가지로.
매일 아침 요가를 하고 있다. 시작은 6년 정도 된 것 같다. 2012년, 혼자 낯선 나라에 살게 되었던 때, 내 시간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나에게 있음을 절실히 느꼈다. 설렘과 두려움이 함께였던 순간. 불가능한 것 빼고 모두 다 가능한 도시 뉴욕. 국가를 초월한 나만의 룰이 필요했다. 건강하고, 강건하게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부지런히 읽고 듣고 썼다. 모든 것을 기록하고 싶었다. 매거진 Achim의 시작이 되었던 기록도 그때였을 거다. 그리고 요가를 시작했다. 매일 아침 달리기를 하는 하루키처럼 매일 아침 요가를 했다. 점점 동작이 익숙해져 탁한 생각을 맑게 정리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겨났다. 몸은 인스트럭터의 안내에 따라 알아서 움직이고, 의식은 흐름대로 흘러간다. (물론 동작에 집중하는 것이 운동엔 좋겠지만) 덕분에 많은 고민을 부러트렸고, 큰 결심을 그 작은 요가 메트 위에서 해 나갔다. 지금도 여전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하루키는 작가이자 러너이다. 적어도 끝가지 걷지는 않겠다는 신념을 가졌다. 내겐 아직 이렇다 할 신념은 없지만 윤진은 콘텐츠 기획자이자 요기(yogi)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