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뭐가 있을까?
초록과 파랑, 잎이 빽빽이 달린 나무, 뜨거운 햇살, 도로에 이글거리는 아지랑이, 노란 해바라기 그리고 시원한 물속에 풍덩 빠지고 싶은 마음.
내가 생각하는 여름의 모습이 그대로 그려진 곳에 다녀왔다. 그곳은 바로 후쿠오카 오호리 공원.
하카타역에서 전철을 타면 금방 닿을 수 있는 오호리 공원(Ohori Park)은 후쿠오카 여행에서 꼭 가봐야 하는 곳이다. 무엇이 특별하길래 다들 이곳을 추천할까 궁금해졌다.
오호리 공원으로 가기 전, 우리는 36도에 육박하는 후쿠오카의 더위를 견뎌보고자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얼굴, 팔, 다리에 선크림을 듬뿍 바르고, 선글라스를 끼고, 양산을 챙겼다. 통풍이 잘되는 흰색 커플티에 활동하기 편한 바지, 운동화까지 신으면 후쿠오카룩 완성. 어차피 땀에 젖을 것이기에 멋 부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는 안 덥다, 안 덥다' 주문을 외우며 호텔 밖을 나섰다. 역시 정신이 몸을 지배하는 것인가. 생각보다 덜 덥게 느껴졌다. 습하지 않은 바람과 가로수들 덕분인가 보다. 하카타역에서 전철표를 끊고 오호리 공원역으로 간다. 일본 전철표를 한 번 끊어봤다고 벌써 익숙하다.
오호리 공원역 1번 출구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면 멀리 공원이 보인다. 큰 호수랑 호수에 띄워져 있는 오리배, 산책로의 버드나무까지. 동네 공원의 크기가 아니었다. 공원의 크기에 한 번 놀라고, 뜨거운 햇볕에 두 번 놀라며 짧은 산책을 시작했다. 워낙 더운 일본에서는 다들 양산을 갖고 다닌다고 하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 양산을 쓰고 있었다. 우리의 초록색 양산도 빛을 발했다. 10분 정도 걷다 보니 그 유명한 스타벅스 오호리 공원점이 나왔다. 커피 한 잔 마시며 아름다운 호수 풍경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오호리 공원 스타벅스는 필수로 들려야 하는 곳이다.
스타벅스에 들어가자마자 매의 눈으로 자리를 스캔했다. 이럴 때 수 십 군데의 카페를 다닌 카페 콜렉터 경력이 나온다. 럭키하게도 딱 두 자리가 났다. 역시 우리는 자리 요정인가. 일본에서만 파는 파인애플 음료랑 여름의 정석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키고 나니 창 밖에 해바라기가 보였다.
해바라기를 보니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인 '태양의 노래'가 떠올랐다. 햇빛을 보면 죽게 되는 불치병에 걸린 카오루와 서핑을 좋아하는 평범한 소년 코지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햇빛을 볼 수 없는 그녀에게 해가 지면 만나러 가겠다는 코지의 순수한 마음과 코지만 바라보는 해바라기 같은 카오루의 마음이 절절하게 와닿는다. 밤마다 버스킹을 하던 카오루는 코지 덕분에 음반을 냈지만 세상을 떠나게 되고, 그녀의 관은 노란 해바라기로 뒤덮이며 영화가 끝난다. 일본 영화 특유의 감성이 있고 슬픔을 드러내지 않고 잔잔하게 흘러가 더 슬픈 영화다. 오호리 공원의 뜨거운 햇살을 받고 있는 해바라기를 보고 있자니, 영화 속 카오루의 모습이 그려졌다.
창 밖을 보며 잠시 추억을 곱씹다가 공원 안에 있는 후쿠오카시 미술관을 가기 위해 나섰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일본의 20세기 이후의 작품들을 모아놓은 근현대 컬렉션과 미국의 유명 작가인 키스 해링전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근현대 컬렉션만 둘러보고 나왔다. 미술관 앞에는 일본의 대표 예술가인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그 호박이다.
미술관을 지나면 조경이 매우 아름다운 일본 정원이 나온다. 오호리 공원을 알아봤을 때, 이곳을 꼭 가보고 싶었던지라 바로 티켓을 끊었다. 오호리 공원 일본 정원은 예쁘게 꾸며진 다실, 연못, 폭포가 있는 곳이다. 일본 전통 다실에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예약제라고 하여 들어가지 못했다. 대신 채도를 최고로 높인 듯한 푸르고 쨍한 풍경을 보게 되었다. 안 왔으면 후회했겠구나 싶을 정도로 관리가 잘 되어 있었고,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 심지어 잎이 무성한 나무들 아래를 걷고 있으니 손 선풍기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 더운 여름이자 평일인 덕분에 방문객이 적어서 최고의 풍경을 천천히 둘러볼 수 있었다. 작지만 알차게 짜인 일본 정원은 후쿠오카 여행을 앞둔 분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장소다.
여름이지만 여름을 잊었던, 여행이지만 일상 같았던 오호리 공원에서의 시간. 오리배랑 나룻배가 둥둥 떠있는 큰 호수와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그 사이를 웃으며 걸어가던 우리의 모습. 더위에 약한 내가 이렇게 잘 버틸 줄 몰랐다. 여름의 후쿠오카 꽤나 괜찮은 걸. 초록의 기운을 받으며 내 마음도 말갛게 개었다. 선크림과 양산 그리고 그의 손만 잡으면 일본 어디든 갈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