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컨퍼런스 4를 다녀와서
그냥 알고 지내거나 별로 가깝지 않은 낯선 사람들과의 관계처럼
일상적으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 인맥이 우리의 삶을 흥미진진하고
풍요롭게 만들어줄 기회와 정보, 혁신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 리처드 코치, 『낯선 사람 효과』, 흐름출판(2012), p19.
그렇다. 생각해보면, 변화나 도전의 결심은 가까운 사람보다는 내가 잘 모르는 낯선 이에서 시작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약 2주 전 거래처 대표님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제주에서 40명이 모여 2박 3일간 '낯선 컨퍼런스'를 하는데, 오지 않겠느냐고. 흥미로운 설명에 이끌려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초대에 응했다.
'낯선 프로젝트'와 '리뷰빙자리뷰'등 사이드 프로젝트로 낯선 사람들을 연결하는 록담이 시작한 프로젝트다. 스태프의 초대로만 낯선 사람 40명을 모은다. 그리고 '언컨퍼런스'(특정한 형식이나 규제 없이 누구나 발표하고 토론할 수 있는 컨퍼런스, 참여자가 곧 행사의 주체가 된다.)의 형태를 취해 2박 3일간 진행된다.
2017년부터 매년 2-3월에 열리다가, 2019년 3월 낯선 컨퍼런스 3 반응이 너무 좋아 2019년 가을에 다시 열리게 된 낯선 컨퍼런스 4. 매 번 주제가 달라지는데, 이번 주제는 '라이프스타일'이었다.
3분 자기소개 - 낯컨올림픽 - 3분 1:1 캔미팅 - 저녁 - 뒤풀이
체크인 후 2시부터 공식 행사가 시작되었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오지 못한 4명을 제외하고 36명이 제주 플레이스 캠프에 모였다. 첫 프로그램은 각자 3분간 발표하는 일. 미리 제출한 pdf 3장으로 발표를 했는데, 정말 오랜만에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던 시간이었다. 서른여섯 명 중, 비슷한 스토리를 가진 사람이 단 하나도 없었다. 다음은 플레이스 광장에서 이어진 낯컨 올림픽. 8명씩 네 팀으로 나뉘어서 2인 3각 달리기, 신발 던지기와 캐리어 컬링을 하다 보니 긴장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1:1 캔미팅은 맥주 한 캔을 들고, 모두와 3분씩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자기소개를 들으면서 흥미로웠던 것들을 메모하고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짧지만 길다면 긴 3분. 어색하면 질문을 쏟아내는 습관 때문에 상대에게 질문할 기회를 준 것 같지 않아 후회가 됐다. 끝나고 나서 내가 받았던 질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질문은 '요즘 좋아하는 게 뭐예요?'였다. 인상이 좋다는 말도 기분이 정말 좋았다. 다음번이 있다면, 나도 기분 좋은 칭찬을 건네고 조금 더 가벼운 질문을 던지거나, 상대가 먼저 말을 걸 시간을 충분히 줘야지.
캔미팅이 끝나고, 라이프스타일과 관련된 질문을 적어 제출해야 했다. 내일 있을 언컨퍼런스의 주제로 쓰일 예정. 바로 적어서 낸 사람, 오랫동안 고민하고 제출한 사람이 있었다. 다들 어떤 주제를 던졌을지 궁금했다.
팀원과 함께 앉아 먹은 저녁과 늦은 시각까지 이어진 뒤풀이는 정말 재밌었다. 이때쯤부터 긴장이 풀리고 재밌어지기 시작한 것 같다. 모두들 긴장이 풀린 분위기에서 자리를 옮겨가며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어 좋았다.
언컨퍼런스 - 숏트립 팀 구성, 점심식사 - 숏트립 - 숏트립 발표 - 뒤풀이
10시부터 시작된 언컨퍼런스. 전날 적어 낸 질문을 주제로 함께 이야기해보는 시간이었다. 벽에 5개의 주제가 붙고, 질문을 적은 모더레이터 1명과 그 주제에 관심 있는 사람 5명이 붙어 총 6명이 40분씩 이야기하는 형식이었다. 총 3라운드가 진행되었다.
내가 참가했던 주제는 다음과 같았다.
1 인생에서 중요한 게 뭘까요?
2 좋아하는 걸 해야 할까요, 잘하는 걸 해야 할까요?
3 회사를 키우지 않고도 지속 가능한 회사를 만드는 법
6명이서 각자 이 주제를 선택한 이유를 말하고, 자연스럽게 주제에 관련해 대화를 나누었다.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어제와는 다르게 좀 더 깊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다. 40분이 턱도 없이 부족하게 느껴졌지만, 한 주제에 대해 다양한 생각을 들을 수 있어 좋았다. 그룹이 조금 더 작거나, 시간이 조금 더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었다.
내가 모더레이터로 참여했던 첫 번째 주제에서는, 각자 가장 중요한 4가지를 적어보았다. 재밌는 건, 표현의 차이는 있었지만 다들 같은 걸 적어서 냈다는 것. 개개인의 인생이 다 다르고, 복잡한 것 같지만 정말 중요한 것만 꼽자면 결국 인생이란 단순한 게 아닐까 싶다.
숏트립은 4명씩 랜덤하게 팀을 짜서 진행되었다. 우리 팀만 3명이었다. 다섯 시간 동안 함께 여행을 해야 하기에, 조금이라도 친해진 사람과 같은 조가 되길 내심 바랬지만 공교롭게도 캔미팅 이후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은 멤버들과 한 팀이 되었다. 팀 멤버 중 한 명은 제주 생활 3년 차인 플레이스 캠프 스탭이었다. 점심시간에 어디갈지 얘기를 하다가 자차 코란도로 오프로드를 달려보자는 결론이 나왔다.
인적이 드문 숲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말도 안 되게 아름다웠다. 잔디밭을 달려 언덕까지 올라가는데, 온 세상 자유를 다 얻은 느낌이었다. Paul Simon의 Graceland를 들으며 차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이 정말 행복했다. 그렇게 란도와 여러 스팟들을 돌며 잔디밭 위에서 뒹굴고, 뛰고, 럭비공을 던지고, 건초더미 위에서 가만히 쉬다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면서 다섯 시간을 보냈다. 마음의 벽은 그렇게 허물어졌고, 어렵게 느껴졌던 멤버들이 너무 좋아졌다.
다시 플레이스 캠프로 돌아와, 9팀이 무엇을 했는지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제주에 사는 멤버의 작업실을 놀러 가거나, 미술관을 가거나, 올레길을 걷거나, 승마를 하거나, 소주를 진탕 마시고 대리운전을 불러 돌아온 팀도 있었다. 일상에서 훅 지나가는 다섯 시간인데, 제주에서 낯선 이들과 함께한 다섯 시간은 정말 특별하고 소중했다. 그리고 다른 8팀이 느꼈던 즐거움이 나한테까지 느껴져서 더 좋았던 것 같다.
한 시간의 휴식 시간 후, 기나긴 뒤풀이가 시작되었다. 벌써 마지막 밤이라니, 다들 아쉬운 마음이었다. 도착해서 뽑았던 마니또 발표와 후기를 전하는 시간. 불과 전날이었는데 자기소개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그새 낯선 사람에서 아는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다가가기 어려웠던 사람들과도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분명 밖에서 만났다면 할 수 없던 대화들을 하며,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이 가득 채워져 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새벽 4시가 지나서도 밤은 광장에서 계속되었다. 잔디밭에 앉아 보드게임을 하는 그룹, 둘러서서 게임을 하는 그룹, 광장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나누는 그룹으로 나뉘어 각자의 밤을 보냈다. 그렇게 찾아온 3일 차의 아침. 3일차는 아무 프로그램도 없었다. 나는 밤을 새우고 오전 비행기로 떠났고, 비행시간이 늦은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갔다. 작별인사도 안 하고 헤어지는 게 낯컨스러워서 좋았다.
사실 나는 나이로 낯컨 자격 미달이었다. 30-40세라는 나이 제한이 있었기 때문인데, 스태프분들의 배려로 참여할 수 있었다. 나보다 다섯 살에서 열 살 이상 많은 분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아무도 나를 어리게 취급하지 않았다. 낯컨이 아니었다면 이런 분들과 이렇게 열린 마음으로 만날 수 있었을까 싶다.
뭘 하면서, 어떻게 살 지 고민을 참 많이 하는 편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를 시도하다가 확신이 가는 분야를 찾으면 30대 때는 정착해서 좀 더 깊게 파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정답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40대가 되어도 끊임없이 배우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개척해 나가는 분들의 이야기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주 1일 근무로 3개의 직장을 다니며 다양한 프로젝트와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하시는 분, 높게 쌓은 커리어를 버리고 하고 싶은 것을 찾아 다시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도전을 꿈꾸는 분, 17년 간 잘해오던 것을 떠나 새로운 출발점에 선 분, 성공적인 비즈니스 오너이지만 더 먼 미래를 보고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는 분, 세상의 아픔에 도움이 되고자 사업을 시작한 분, 회사를 다니면서 여가시간에 매일 꾸준히 자신의 콘텐츠를 쌓아 나가시는 분,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일만 하자는 모토로 직원들이 행복한 회사를 이끄는 분, 다 적을 순 없지만 많은 고민과 시도 끝에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가고 있는 서른다섯 분과의 만남은 나에게 폭풍과 같은 파동을 일으켰다.
한국에 와서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목적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편한 관계가 된 사람은 거의 없다. 낯선 사람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건 쉽지만, 관계를 이어 나가는 건 너무 어렵다. 그런데 낯컨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왠지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헤어지자마자 다들 즉흥적으로 가볍게 만나고, 이것저것 같이 하자는 제안을 쉽게 한다. 분명 다들 일할 시간인데도 단체 카톡이 시도 때도 없이 울린다. 이렇게나 열린 마음이 정말 아름답게 느껴진다. 친구가 35명 생긴 느낌이다.
재밌겠다는 기대를 하고 갔지만,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시간이었다. 앞으로 좀 더 과감하게 나아갈 힘이 생긴 것 같다.
사이드 프로젝트로 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순간을 선물해주시는 록담 님,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스태프분들 고생 많으셨고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