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들의 여행
바르셀로나에서 첫 아침을 맞이한 첫째날 새벽, 8시 반까지 까사 바트요 앞으로 집결하라는 문자를 받았다. 전날 밤에 다음날 일정을 ‘가우디 투어’를 하기로 정하고 여러 여행상품을 검색하다가 ‘인문학 가우디 투어’라는 타이틀이 마음에 들어서 예약을 했다. 하루 전 예약이라 안 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다행히 승인이 되어서 안내문자를 받았다. 바르셀로나에서의 첫날밤이어서 자는둥마는둥, 시차 적응이 안 되어 피곤한 몸을 일으켜 까사 바트요 앞으로 나갔다.
바야흐로 이십년 전, 지독하게 편의점 알바를 해서 모은 돈으로 유럽 한달 배낭여행을 다녀온 A는 여행 후 내내 처음 듣는 어느 건축가 이야기를 주구장창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희한한 건축물을 설계한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 그도 건축학도여서 남다른 인상을 받았나보다 했지만 그 때의 이야기는 내 머릿속에 ‘스페인=바르셀로나=가우디’ 등식을 뚜렷하게 새겨놓았다. 그래서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중요하게 먼저 해야 할 일은 가우디를 만나는 일이었다. 그 일정을 전날 밤에 결정하긴 했지만 말이다.
가우디와 그의 작품들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한 인간의 종교적 열망과 예술적 집념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눈으로 보았다. 타일 하나, 문양 하나, 문의 손잡이 하나에도 그의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디테일의 끝판왕이다. 이미 100년 전에 죽은 사람인데 바르셀로나 어딘가에 여전히 살아있는 것 같았다.
가우디 투어는 까사바트요를 시작으로 까사 밀라, 구엘공원을 들렀다가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 끝나는 반나절 일정이었다. 약 15명이 한 팀이 되어 한 명의 가이드가 인솔했다. 우리에게 배정된 가이드는 설명 중간중간에 연관된 BGM을 깔아주고, 지금은 츄파춥스의 소유가 된 까사 바트요 앞에서 츄파춥스 하나씩 나눠주면서 인증샷 구도까지 알려주는 하늘씨는 J가 분명하다. 말의 속도, 힘주어 말하는 포인트, 음악 선곡, 스토리텔링이 모두 치밀하게 계획된 느낌을 주었다. 덕분에 P 가족은 귀호강, 눈호강에다가 뇌주름이 촘촘해지며 바르셀로나와 가우디에 흠뻑 빠져들었다.
구엘공원에서 버스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근처에 내린 다음, 늘어선 인파를 따라 성당쪽으로 이동할 때였다. 아직 성당은 보이지 않고, 사람은 너무 많고, 사진으로만 보던 사그라다를 실제로 보면 어떨지 궁금해하면서 가이드를 따라 걸었다. 앞서 걷던 가이드는 우리를 세우고 뒤돌아서서 말했다.
“지금 서신 자리에서 시선을 위로 보지 마시고 바닥을 보면서 앞으로 좀더 나오세요. 그리고 거기에서 오른쪽으로 인도끝쪽으로 다섯발자국 가보세요. 이제 몸을 다시 45도 틀어서 위를 바라볼텐데요. 놀랄 준비가 되셨으면 고개를 들어보세요!”
바로 그 자리에서 성당을 처음 만나고 놀라는 ‘우와’ 포인트. 발걸음과 눈높이까지 계산해서 우리를 안내하는 하늘씨는 J가 확실해졌다.
P 가족은 J 가이드를 만나 행복했다. 나는 가져간 ‘추위타는 북극곰’노트에다가 하늘씨의 가우디 스토리텔링을 한 마디도 놓칠세라 열심히 받아적었다. 무려 12쪽에 달하는 가우디에 대한 기록. 마지막에 하늘씨는 내가 투어팀 대열 앞에 서서 너무 열심히 받아적어서 적잖이 긴장을 했다고 했다. 나 덕분에 더 완벽한 가이드를 듣게 되었는지도. 나는 어쩌면 조금은 J스럽고 싶은 P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