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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에 관한 아주 짧은 관심

북그북그01_엘레나 메델×막스 에른스트

by 유시
막스 에른스트, 첫번째 분명한 말에서, 1923, 232×167cm, 뒤셀도르프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미술관


처음 이 그림을 보면 아무런 맥락도 없고 책 제목과도 어떤 연결점을 찾을 수 없다. 한마디로 난해하다.


엘레나 메델의 <소유에 관한 아주 짧은 관심>의 표지화로 이 막스 에른스트의 그림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에레나 메델(1985~ )은 스페인 코르도바 출신으로 10대 때 첫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녀의 첫 소설이다. 스페인어 원작 소설의 표지는 이와 다르다. 이 그림은 한글 번역판에 쓰였다. 사실 소설의 원제도 다른데, <경이로움>(Las Maravillas)이 원래 제목이다. 무엇에 대한 경이로움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번역본의 제목을 <소유에 관한 아주 짧은 관심>으로 한 것은 이 책이 "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말하지만 이 책은 경제적 제약이 우리의 인생에 미치는 아주 큰 영향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주인공이 마리아, 카르멘, 알리시아라는 여인 3대의 이야기여서 페미니즘의 자장 안에서 이루어진다. 세대를 달리하는 세 여인이 각기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제약과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는지 아니면 어떻게 굴복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과정은 개인으로서 자립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를 강조하다보니 가족의 의미는 상대적으로 축소된다.


이들 여인 3대는 특이하게도 아무런 접촉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감정적인 교류는 물론이고 물리적인 접촉 자체도 없다. 1대인 마리아는 미혼모로서 유부남의 아이를 낳고 집을 떠난 이후 딸 카르멘과 정서적 교류를 쌓지 않는다. 대도시 마드리드에서 생존하기 위해 그저 돌봄노동자나 청소노동자로서 분투할 뿐이다. 딸을 데려올 만큼 돈은 끝내 모아지지 않는다. 2대 카르멘은 엄마보다 더 어린 나이에 혼전임신으로 결혼을 선택하고 한때 풍요로운 생활을 한다. 하지만 경제적 파산으로 남편이 자살하면서 다시 자립을 위한 생활전선에 뛰어든다. 그녀에게 가족은 아무런 힘이나 의지가 되지 않는다. 3대 알리시아는 일단 가정을 꾸리지만 아버지의 자살과 경제적 신분 추락의 트라우마 속에서 그 상실과 공허감을 스쳐 지나가는 타인과의 섹스중독으로 해소하며 그날그날의 생계노동으로 스스로를 소진시킨다. 종반부에 할머니 마리아와 손녀 알리시아가 길거리 시위의 소요 과정에서 잠시 조우하지만 조손 관계는 암시만 될 뿐 서로에게 드러나지 않고 타자로서 여전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지나쳐간다.


이들에게 가족이나 모녀 관계를 뛰어넘어 자립하는 삶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경제적 자립 주체로서 마리아는 남자친구의 청혼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하고 결혼하지 않는다. 가족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 돌봄노동을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이다. 또다른 경제적 자립 주체인 알리시아는 결혼은 했지만 결혼이 구원이나 자유로 이어지지 못한다. 그녀에게 결혼은 원나잇 만큼이나 가볍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은 제약 속에서 또는 제약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다. 작가는 이 가운데 돈의 제약을 유달리 강조한다. 계급이라는 용어까지 들먹이며. 하지만 우리네 인생은 돈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선택지들이 열려 있고 우리들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진력한다. 그 과정과 결과야말로 우리들 인생의 경이로움이 아닐지.


표지화인 막스 에른스트의 <첫번째 분명한 말에서>는 제목부터가 당혹스럽게 다가온다. 사실 이 그림은 초현실주의 시인 폴 엘뤼아르의 집에 있는 벽화의 일부이다. 제목도 엘뤼아르의 시에서 따왔다. 막스 에른스트와 폴 엘뤼에르는 여행을 같이 하기도 하고 몇달 동안 생활을 함께 하기도 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는데, 그 와중에 아마도 엘뤼아르의 아내인 갈라에게 에른스트가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제목을 가져온 엘뤼아르의 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네 몸의 첫 웃음과 첫번째 분명한 말에

막막한 길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다"



막스 에른스트, 갈라 엘뤼아르, 캔버스에 유채, 1924. 81.3 × 65.4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막스 에른스트의 많은 작품이 그렇듯이, 그림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선 눈에 띄는 것으로만 보자면 먼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창 두 개가 뚫린 벽이 보인다. 벽의 앞뒤로는 성냥개비를 연상시키는 길다란 기둥이 있고 그 끝에는 유황 대신 녹색의 나뭇잎이 겹쳐져 있다. 중앙의 큰 창에 손이 하나 나와 있고 손가락 두 개가 엇갈려 꼬여 있는 가운데 끝에는 작은 과실처럼 보이는 붉은 구체를 쥐고 있다. 그 끝에서 나온 실이 벽에 박혀 있는 세 개의 못을 위아래로 한두 바퀴 돌려 꺽어 왼쪽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반대쪽 끝은 녹색의 곤충으로 연결된다. 곤충은 두 마리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는 모습이다. 다른 초현실주의 그림처럼 기이하기만 하다.


혹자는 정신분석학적으로 붉은 구체가 금단의 열매처럼 유혹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기이하게 생긴 곤충은 파스미드(phasmid)로 불리는데, 꿈 상태의 환영을 암시하기 위해 선택된 것으로 해석한다. 파스미드란 이름은 그 모습 때문에 "환상"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phasma"에서 유래되었다. 나무줄기나 막대, 혹은 나뭇잎처럼 위장하거나 앞뒤를 서로 헷갈리게 만드는 모습으로 상대를 혼란케 하는 능력은 일종의 환영을 불러 일으킨다.


이 곤충은 붉은 유혹의 열매에서 나온 실에 포획되어 있다. 그런데 가만보면 실은 벽에 M자 형태를 그리고 있다. 붉은 열매를 쥔 여자의 손가락은 다리처럼 기형적인 모습인데 검지와 중지를 서로 꼬아 X자를 그리고 있다. 이로써 MX, 즉 막스 에른스트의 MaX가 드러난다. 지나친 억지인가? 그런데 폴 엘뤼아르도 PL(PauL)로 서명하곤 했다고 한다. 정리하자면 막스 에른스트가 폴 엘뤼에르의 아내 갈라를 유혹하고 있는 것을 에둘러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 그럼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을까? 어쨌거나 막스 에른스트는 그 이듬해 <갈라 엘뤼아르>를 제목으로 한 작품을 그렸다.


시인의 말처럼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는 일은 경이로운 일이다. 당신이라면 그걸 소망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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