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도 식사도 잘하셨는데 그렇게 갑자기 의식이 없어지다니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쉬고 싶으셨던 아버님의 의지로 의식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넘어가신 건 아니었을까.
간사한 뇌는 재빨리 방어기제를 찾았다. 의식이 있었을 때 대화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든지, 중환자실에서 너무 오래 고생하지는 않아서 다행이라든지 그런 것 말이다.
장례식은 생각보다 바빠서 슬퍼할 틈이 없었고, 한편으로는 바쁜 게 좋기도 했다. 어디 하나 틈이 생기면 무너질 것 같아서 모두들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맡은 일을 했다. 그러는 사이 슬픔은 점점 동그랗게 뭉쳐져 갔다.
입관식. 백색왜성이 되었던 아버님은 이제 땅에 떨어진 운석 같았다. 아버님의 아들들이 많이 울었다. 아들들에게는 말 수 없는 엄한 아버지였다고 하는데 며느리에게는 다정하셨다. 나에게도 직접 말씀하시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애들 공부는 잘하냐’는 질문과 ‘착한 네가 참느라고 병이 났구나’ 하는 말만은 직접 하셨다.
지금도 나는 눈을 감으면 수의에 싸인 아버님의 하얀 발이 보인다. 해달씨는 아직도 이마에 눈물이 고여있어 눈을 뜨기가 힘들다고 한다. 10월이 너무 길다고도 한다. 나는 슬퍼하는 일에도, 슬픔을 달래는 일에도 서투르다.
장례 기간에는 조문객이 시간을 가져가 주었는데, 장례식이 끝나면 느려진 시간을 각자 견뎌야 한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만든 크고 동그란 슬픔이 터지면 인생 구석구석으로 넓게 스며들어버린다. 그래서 어느 날 일상을 다시 찾은 것 같은 날에 평소에 즐기시던 반찬을 보거나 닮은 뒷모습을 볼 때에, 들깨 태우는 냄새가 바람에 묻어올 때에, ‘참느라고 병이 났구나 ‘ 하는 소리가 마음속에서 울릴 때에, 참을 새도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오게 될 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