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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Aug 31. 2023

#9 참 특별하고, 참 별볼일 없는 고통을 안고 산다

나에게만 힘든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할 까닭이 있나? 물론 그럼 좋겠지만

오늘은 아침부터 차 수업을 들으러 연희동에 갔다 왔다. 비가 듬성듬성 내리고 있었으나 다행이 '처서'가 지나자 정말 마법처럼 공기가 한결 산뜻했다. 수업을 하는 곳이 워낙에 골목이라 차를 타고 가기 힘들고 대중교통으로는 왕복 3시간 정도 걸렸다. 번거로운 여정이었다. 비몽사몽 일어나 겨우 10시까지 2분 남기고 도착해 아침부터 머리에 온갖 동양차에 관한 지식을 우겨넣으니 부끄럽지만 솔직히 좀 잠이 왔다. 다행스럽게도 차 수업이라 시음의 목적으로 몇 잔 마셔 금새 잠은 깼다. 오늘은  6대 다류라고 불리는 각종 차 종류를 직접 마시고 향을 맡아 볼 수 있었다. 가장 산뜻했던 건 당연히 황차지만, 기억에 남았던 건 역시 우롱이었다.


잎이 채 퍼지지도 못했음에도 우롱차의 향은 우렁차다 못해 먹먹한 마음마저 들게 했던 타이중의 빽빽한 녹음을 연상시켰다. 비록 그 유명하다는 아리산의 코빼기조차 가보지 못한 나지만, 대만 교환학생을 하던 시절 나는 음식도 문화도 맞지 않아 자주 우울해하던 친구 조이를 따라 한달에 두어번은 타이페이에 가 한인 민박집에서 며칠을 보내곤 했다. 타이완의 KTX는 아주 높은 곳으로도 다녀서, 기껏해야 계양산 정도나 등반해 본 나에게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높은 산을 통과하는 일은 아주 생소한 경험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때, 대만으로 교환학생을 갔던 건 내가 대학시절 했던 '잘난 척'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당시 우리 과 친구들 사이에서는 교환학생 '붐'이 일었다. 대학 시절 한번쯤 해봐야 하지 않겠냐고,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해외에 그렇게 오래 나가보겠냐고 한두 명 이야기하자 다들 맞아맞아 하고 홀린 듯이 전 세계로 원서를 돌렸다. 개중 유럽 역사에 뜻이 있어 스페인이나 체코 등으로 의미있는 경험을 했던 친구들도 있었지만, 남들도 다 하니까 아무 생각없이 넣어본 사람도 분명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단연코 후자였다. 처음에 난 핀란드를 지원했다. 이유는 너무 단순해서 남들이 물어보면 거기 학교가 어쩌구 이럴때 아니면 어쩌구 하고 둘러 댔지만, 솔직히 무민 월드에 가보고 싶었다. 일종의 허영이었다. 남들이 얘기했을 때 나도 한 번 어디 갔다왔는데 하고 잘난 척 이야기하고 싶어서 부린 객기였는데, 문제는 내 학업수준에 핀란드는 무리였다.


대학시절 학교에서 보는 대체 토익 시험을 대체 몇번을 봤는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부모님께도, 친구들에게도 비밀로 하고 '될 때까지 해보자' 라는 마음으로 한학기 내내 시험을 봤다. 그러나 종강 때까지 핀란드 갈 점수는 나오지 않았다. 당연했다. 공부를 못했다. 게다가 우리 과는 인문사회학부에 속해 있으면서도 한학기 내내 영화 분석, 축제 기획 등 중간, 기말 모두 과제로 성적을 매기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간신히 3점 대 중후반의 성적을 유지했으나, 시험은 늘 잼병이었다. 학창시절처럼 시험만 봤으면 난 3점대도 못 넘었으리란 확신이 있다. 그러나 동기들에게 내가 그런 멍청이라는 사실을 들키는 게 그땐 죽기보다 싫었다.


내 동기들은 당시 우리과 내신 지원 등급과 비슷한 점수를 맞았는데, 난 솔직히 할아버지때부터 쌓아온 이런저런 공덕으로 겨우 들어온 '추가 입학생' 이었다. 게다가 팀플이 많고 의무적으로 1년에 두번씩 답사를 가야 했기에 싫어도 좋은 척 반갑지 않아도 반가운 완벽한 신입사원같은 사람이 아니면 교수님부터 선배, 그리고 후배들 사이에서 은근히 겉돌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있노라면 나는 시시각각 내가 얼마나 헐겁고 부족한 인간인지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누군가 나에게 직접적으로 비난을 한 적은 없었지만 피해의식에 쩔어선 자존감은 낮고 자존심만 강한 나에게 모두 함께 두루두루 자신있게 구김살 없이 지내야 했던 우리과의 분위기는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정말이지 수능을 다시 볼 용기가 없어 울며 겨자먹기로 겨우 졸업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나는 동기들 앞에서 내가 정말 뒤떨어지는 사람인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아등바등 교환학생을 가려고 했고, 결국 영어 성적도 뭣도 아무것도 보지 않는 곳은 대만의 웬자오 대학교 뿐이라 거기로 갔다. 남들 앞에서는 있어 보이는 척 하려고 '훠궈 먹으러 훠궈 유학갔다' 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냥 학교를 다니기 싫었다. 그리고 동기들 앞에서 있어보이는 척하고 싶어다. 집에 쳐박혀서 자살계획이나 세우던 우울하고 못난 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 후로도 내 인생은 비슷한 일의 연속이다. 취준해서 좋은 곳에 갈 용기가 없어서 무작정 받아준다는 곳에 들어갔고, 판타지 웹소설을 그리 많이 읽지도 않았으면서 대뜸 글에 관한 일을 하겠다고 웹소설 회사에 들어갔다가 얼떨결에 플랫폼에서 일을 했다.


내 마지막 회사에서, 어느순간부터 나는 더이상 이 삶을 지속해나갈 용기가 없었다. 잘난 척을 하다하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 회사엔 정말 '잘난' 사람밖에 없었다. 매일 성과지표를 확인하고 부족한 매출을 채울 방안을 고려하며, 각종 모니터링을 통해 리스크를 원천 차단하면서, 관계사와 나이스한 소통을 이어가고 확실히 매출로 이어지는 작품을 고르는 실력이 내겐 없었지만 그래야만 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런 능력이 있는 척하는 것도 어느 순간 한계였다. 작년에 나는 면담만 하면 팀장님을 괴롭혔다. 못하겠어요. 제 능력밖의 일이에요. 죄송해요. 팀장님은 나를 달랬고, 혼내기도 했다가 종국엔 지쳐버렸다. 이렇게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사람이었는데, 내가 그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도 지쳐 버렸다.


작년에 나는 모든 면에서 한계였다. 어떤 사주집에서는 애 뗀 사람, 혹은 장례식장에 갔다 온 사람, 또는 주위에 가족이 죽은 사람에게 묻은 무언가가 내게 붙었다고 할 정도로 안 좋은 일만 일어났다. 회의실에서 4시간 동안 죄송합니다. 하고 스스로가 얼마나 멍청한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새벽에 겨우 집에 들어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될까 생각하다보면 또 아침이 와 출근해야 했다. 부모님을 보면 눈물이 나는 데, 얼토당토 않게 화를 내고 싶기도 했다. 다 아빠 때문이야 하고 울며불며 패악을 부리고 싶었다. 정확히 무엇 때문인진 알 수 없었다.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대화를 하다보면 은근한 책망이 묻어났다. 두 사람 때문에 내가 살아있는데, 어린 시절은 온통 지뢰밭이라 현재를 견딜 용기도 안난다고 속으로 그런 얼토 당토 않는 책망을 했고 두 사람이 미웠다.


당시 다녔던 신경정신과 선생님께 나는 이렇게 부족하고 못나게 살고 있고 그런 사실을 생각하면 죽어버리고 싶은데, 부모님은 나를 잘 키웠다고 생각하시는 게 너무 열이 받는다고 그런 이야길 많이 했다. 남의 인생을 망쳐놓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그러면 선생님은 잠깐 나를 들여다보다가 지혜씨 인생은 망하지 않았다고 내가 멋대로 저 멀리 던져버린 진실을 툭툭 털어 살며시 내 앞에 놓았다. 그것도 물론 잘난 척이다. 나는 부모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고 있고, 그럼에도 그들이 사람이기 때문에, 신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한 사랑을 줄 수 없었다는 사실 역시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난 거만하게 굴었다. 사랑을 먹고 피둥피둥 배가 부른 주제에 말이다.


심지어는 내가 자라면서 부모님의 통속적이고 인간적인 어떤 나약한 면들, 이를 테면 뚱뚱한 사람들을 보면 비웃는다거나 어떤 인문학적인 이야기를 하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순간들, 또는 집에 당구대를 놓겠다는 식의 어린 아이같은 계획에 남들에겐 결코 그러지 않을 거면서 부모님 면전에서 대놓고 혀를 차기도 했다. 무례하고 오만하게 굴었다는 사실 역시 분명하게 알고 있었으면서 내 딸이 언제 이런 악귀가 되었을꼬 하고 혼나고 있노라면 명치에서 치미는 수치심을 감추려고 일부러 고개를 숙였다. 기분따라 훈육하던 부모 밑에서 덜덜 떨던 어린 내가 과거엔 분명 있었다. 하지만 성인이 된 나는 내가 더이상 어린 애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 부모님이 그 어린 애와 성인인 나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용했고 부모님은 나와의 관계에서 계속해서 가해자가 되었다. 나는 툭하면 어린시절 이야기를 들먹이며 그들을 못살게 굴었다. 사실 등신, 바보, 천치. 하고 망치로 머리를 내리치고 싶은 건 나였음에도 그렇게 어리광을 피웠다.


결국 모두 같은 맥락이다. 잘난 척. 난 내 스스로가 얼마나 못나고 천치같은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잘난 척을 하다가 주위 사람들이 나를 버리게 만들었고 종국에는 스스로 죽어야 할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돌아와 사과하고 회사를 그만두었지만 어떤 관계는 영영 잃어서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겨울을 보내고 나면 어떤 가지에서는 영영 싹이 나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나무가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며, 다시 자랄 수 없다는 음울한 은유도 아니다. 나는 살아 숨쉬기에 다시 무더운 여름을, 혹한의 겨울을 살아갈 뿐이다. 그렇기에 모든 현인들처럼 나 역시 이런 식으로 내 힘들었던 시기를 정리하는 것이다.


나는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았는데, 못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실상 내 잘난 면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니 내가 겪은 고통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특별히 더 괴로웠다거나 억울하게 당했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왜냐하면 삶이란 원래 그렇게 좋았다가 슬펐다가 당연지사 나 따위야 아랑곳 않고 흐른다. 나는 누구보다 영롱하게 빛나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그저 작은 점이라서 별로 구분할 필요도 이유도 없는 돌덩이니까. 전민희 작가의 소설, [룬의 아이들 - 윈터러] 에서 나는 그 많고 많은 명대사중에도 이 말을 참 좋아했다.


'한 스푼 정도야 다른 이들에겐 별 것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찻잔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주인공은 인간의 삶 따위야 한철 들꽃처럼 가벼운 엉겹의 존재들을 만난다. 왜 한철 꽃노래에 자신들이 개입해야 하냐는 절대자의 질문에 주인공은 필멸자로서 자신의 삶을 항변한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작가, 박완서 선생님께서는 아들과 배우자를 이른 시기에 잃은 아픔을 갖고 계셨다. 상상하지 못한 고난에 허덕이는 선생님께서는 수녀원에서의 한적한 생활을 통해 당시의 아픔을 정리했고 계속해서 다음 장을 향해 살아가셨다. 그때 남기신 글을 나는 아직도 마음에 품고 있다.


그때 만난 어떤 수녀님이 이상하다는 듯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당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래, 내가 뭐관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을 나에게만은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여긴 것일까.그거야말로 터무니없는 교만이 아니었을까.


나는 스물 하고도 몇년을 내내 하루 빨리 스스로 죽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끝끝내 죽지 못했다. 죽는 데에도 나름의 운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미루어 봤을 때, 사실 나에게는 매 순간 살 수 밖에 없는 어떤 천운도 함께 했던 것이다. 나에게 있었던 어떤 불행한 날들, 스스로의 힘이 부족했거나 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끝맛이 좋지 못했던 일들도 사실 나에게나 고통이지 모두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나 역시 잘난 것도 못난 것도 없는 찻잔이기에 힘든것은 당연했다.


하루아침에도 많은 사람들이 말도 안되는 사유로 죽는 이 세상에서, 몇년에 걸쳐 죽는 것만이 답이라고 생각한 내가 여직 살아있는 까닭도 일맥 상통한다. 나는 잘난 척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녔음에도 춥고 배고픈 날들이 참 많았고, 그럼에도 돌이켜보면 그 허기와 추위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었다. 응당 일어나는 비바람이었고, 한바탕 몰아친 후 뜬 맑은 해의 갯수도 사실 비슷했을 것이다. 잘난 척 굴지만 특별할 것 없는. 세상은 그렇게 돌고 돈다. 별것 아닌 나, 그러나 유일무의한 나. 죽을 만큼 힘들었던 일, 그러나 결국엔 죽지 않아 이어지는 삶.


처음보는 사람들이든 이전에 알던 이든 나를 만나면 다들 지금의 직업부터 묻는다. 내가 근래에 퇴사했다고 답하면 왜 퇴사했는지 묻는다. 이젠 할말도 다 떨어졌고, 솔직히 회사 다닐 적도 잘 기억나지 않아 그냥 힘들었다고 대충 둘러댄다. 그러면 대게, '일이 다 힘들지 뭐... 좀 참아보지...' 라고 답하는 이들이 많다. 그럴 때마다 욱 하고 부아가 치밀면서, 생판 모르면서 나를 그렇게 나약하게 본 거냐고 당신이 뭘 아냐고 화를 내려다가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러게. 좀 참아보지 그랬냐. 뭐 어차피 안 됐겠지만.' 하고 심드렁하게 동의하는 내가 있다. 이처럼 나의 고민도 고통도 크게 보면 별것 없다. 난 그 별것 없는 걸로 지지고 볶고 울고불고 했지만.


그 고통을 나만 아는 것처럼 남들에게도 그렇게 저만 아는 세상이 무너지고 깨지는 그런 고통이 있겠지. 그러나 나도 잘 모르는 남의 일에 무심하게 '에이 그래도 좀 더 해보지' 하고 던지곤 하는 것처럼, 남들도 그냥 그러는 것 뿐이다. 그런 말로 서로를 달래주는 것 뿐이다. 고통은 셀래야 셀 수 없이 많지만 어찌어찌 다 지나왔거나 견디고 있는 것처럼 지금의 고통도 같지 않을까? 하고. 그래서 난 그냥 "그러게요." 하고 웃어 넘긴다. 기억하자 우리는 다 비슷하게 생긴 다른 나라 출신의 사람들이다.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고, 그래서 서로를 이해 못한다. 어쩌면 한치앞을 모를 사랑도 그런 몰이해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사실 우린 참 모험을 즐기는 족속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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