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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Aug 29. 2023

#8 네 사람이 두 사람이 되기까지 일

우리는 다 너무 억울한데, 또 들어보면 다 그럴듯하다는 게 문제다

내 생의 첫 기억은 이제 막 도배장판이 끝난 널따란 아파트를 아직 재미없는 어른으로 자라기 전, 유쾌하고 다정하던 사촌들과 구경온 날에서 시작한다. 코를 간지럽히는 새 아파트 냄새는 지금에서야 몸에 안 좋게 느낄 어떤 화학물질일 뿐이지만 당시엔 그마저도 멋있게 느껴졌다. 엄마가 아주 드물게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지혜야 여기가 이제 우리 집이야. 크고 넓지? 그 말에 나는 부엌만큼만 우리집이냐고 물었다. 엄마는 즐겁게 웃었다. 내가 집이라고 인식하기엔 이곳이 너무 크다는 사실이 엄마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새 집에서 좋은 일만 있으라고, 많은 사람들의 축하와 덕담을 받고 시작했으나 90년대 후반에서 00년대 초반의 거의 모두가 그렇듯 집에는 늘 사건사고가 많았다. 아빠는 회계장부를 만지를 일을 하면서 10년을 다닌 회사가 이제 퇴직금조차 내주기 힘들어질거라는 사실을 빠르게 알아차렸고 장사를 해보겠다고 평생 막냇동생을 저렴한 돌쇠 취급하던 큰누나 큰 형 밑으로 자진해서 들어갔다. 이제 막 마흔 언저리의 아버지는 본인 입으로야 힘든 일 많이 겪었다고 했으나, 큰오빠 큰누나 밑에 새까막한 막둥이로서 그시절에도 무려 서울서 제일 시설이 좋다는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었다.


그 당시 유일하게 사물함이 있던 학교에서 아버지는 그다지 열의있는 학생은 아니었다. 학기 시작하자마자 이제 책을 안들고 다녀도 된다는 후련함에 사물함에 전부 책을 넣고 다녔더니 한 학기도 지나지 않아 야금야금 훔쳐가 전 과목을 그냥 자면서 들었다는 이야기나, 그 중에서도 교과서가 없으면 매를 드는 몇 선생들의 교과목 책만 어디서 구해 도시락과 함께 가방에 고이고이 넣고 다녔다는 이야기, 교장 선생님의 훈화말씀이 너무 지겨워서 담장넘어 도망쳤다가 며칠 정학을 먹었던 이야기를 즐겁게 들려주었던 것을 보아 같은 학교를 다녔다면 나같은 보통 학생들은 야, 야 쟤네 걔네들이다 하고 은글슬쩍 피해다닐만한 학생일 게 분명했다.


고등학교를 그렇게 다소 불량하게, 또 어찌보면 다소 안온하게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막둥이를 어떻게든 떼보겠다고 간장이고 뭐고 할 수 있는 온갖 민간 낙태법을 시도해보다가 결국 피치못해 태어난 아버지를 또 지극히 아끼고 사랑했던 할머니의 보살핌 덕이었다. 없는 살림에 마흔줄에 얻은 막둥이인 탓에, 할머니는 아버지가 학교만 꼬박꼬박 나가면 그렇게 좋아하셨고 그 덕에 학교와 맞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당신의 반항도 결국 학교 인근에서만 드문드문 일어날 뿐이었다. 다른 집이랑 비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지만, 따지자면 나름 곱게 자란 아버지에게 규율, 법칙 보다는 유도리 배짱 같은 것이 어찌보면 더 중요한 동대문 시장바닥은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내 기억이 시작되는 첫 공간, 인천 변두리의 큼지막한 아파트는 아버지가 막 시장바닥에서 깨지고 구르고 하던 때 얻었던 곳으로써 지금 생각해도 두 분께 어찌 그런 용기가 있었을까 싶은 마음도 든다. 집주인에게 하도 구박당하고, 눈치보이던 삶을 살던 두 사람에게는 어떤 울분이 있었다는데 사실 나는 그 울분이 성년시절에 갓 생긴 것이 아니라, 막내아들과 셋째딸로서 형제들 사이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던 어떤 삶이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감히 어림짐작도 들었다. 그러니 돈 한푼 없고, 사회에서 인정받을 만한 직장도 꾸준한 벌이도 없는 아버지와 늘 일을 나갔던 외할머니의 빈자리가 아쉬워 전업주부를 자처한 어머니가 상황에 맞지 않게 무리하여 '내 집'을 마려한 이 상황은 그다지 순탄을리 없었다.   


거진 40평쯤 되는 그 집에 살면서, 우리 네 사람은 먹을 것이 충분치 않아 매일매일 서로를 물어뜯었다. 그중에서 가장 만만한 것은 나였기에 나는 아버지가 술을 먹기라도 하는 날이면 새벽에도 화장실에 가지못해 방문앞에서 전전긍긍 진땀을 흘렸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러나 나도 무고한 피해자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그들 밑에서 길거리에서도 밟히며 자랐던 언니에게 대항해서 나는 자주 패악질을 부렸다. 주로 소리를 지르거나 며칠 말을 안하거나 대답도 않고 계속 울거나 밥을 안 먹거나 하는 식의 패악은 아홉살 때부터 엄마 나 죽을거야. 자살할거야. 유서에 엄마아빠 때문이라고 적고 죽어버릴거야 하는 식으로 부모님을 협박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그러니 우리 넷은 서로를 지독하게 미워했고, 밥상머리에 앉으면 대화가 없었다. 엄머가 참다 못해 우리 너무 대화가 부족한 것 같아. 라고 하면 아버지는 또 자기가 보고 배운데로 엄마가 허락한 대로 그릇에 김치 양념을 덜어내는 나에게 왜 그렇게 더럽게 밥을 먹어? 너 혼자 먹어? 더럽게 뭐하는 짓이야! 하고 소리를 지르는 식이었다. 그러면 언니는 지긋지긋한 집구석이 싫어서 방에 들어가 문을 잠궜고 나는 방에서 뚝뚝 울면서 손발을 덜떨 떨면서 부모님의 화가 풀리길 기다렸다.


혈기왕성한 마흔살의 아버지는 집밖에서 쌓인 울분을 그렇게 불쑥불쑥, 마치 흔든지도 모르고 받아들었을 때 팍- 하고 터져오르는 탄산 음료처럼 전조없이 터뜨렸다. 나와 언니가 아빠가 돌아오면 모른척 하고 있다가 짠! 하고 놀래키려고 티비를 보고 있자고 작당했을 때, 그 1분을 못참고 어디서 아빠가 돌아왔는데, 내가 밖에서 뼈빠지 일하고 돌아왔는데! 하고 소리를 지른다거나, 나와 서로 한대씩 주고받으며 장난감으로 때리기 놀이를 하다가 조금 아프게 맞으면 씨발! 너도 이런 걸로 맞으면 좋겠어? 하고 일곱살 난 애를 후려치면서 씩씩댄다거나 하는 식으로 방금까지도 웃으면서 놀다가도 내면에 화가 팍 올라오면 아버지는 주체할 줄 모르고 날뛰면서 씨발! 정도의 욕을 했고 그 왜소한 몸이 시뻘게질때까지 소릴 지르곤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동정했다. 먹고 살기가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때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그렇게 지뢰밭같은 환경에서 자랐던 우리 자매는, 생존하기 위해 아버지를 사랑하는 법보다 두려워하는 법을 먼제 배웠다.


그래서 사실 넷이 다섯이 되었을 때, 집안 어른들의 유치한 다툼으로 친할머니가 쫓기듯 우리집에서 살게 되었을 때 난 내심 좋았다. 일평생 자식뒷바라지를 하다가 필십에 막내아들의 외딴방에 버려진 할머니는 아버지도 어찌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낳기 적에는 죽도록 떼고 싶어했지만 마흔살에 낳고야 만 막내아들을 끝끝내 아꼈던 것처럼 둘째도 딸이면 안된다고 절에 가서 기도를 올리셨지만 환감 넘은 나이에 얻은 손녀딸을 못내 이뻐하셨다. 할머니만이, 유일하게 그분만이 그 집에서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난데없이 길이길이 날뛰면 제 아들이 언제 저런 악귀가 되었을까 하는 얼굴로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다가 마지막엔 아버지께 미안하다고 해야지. 하면서도 그래고 그렇지, 넌 애한테 왜 소릴 지르고 그래! 하고 같이 맞서 싸워주는 집안내 유일한 어른이었다. 그러면 아빠도 어머니는 빠지세요! 정도로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항의할 뿐 엄마가 날 막아줄 때와 달리 욕을 하지도 못했고 곧 제 어머니 앞에서 이게 무슨 추태인가 좀 더 빠르게 수치심을 느끼기도 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할머니가 이제 더이상 나를 알아보지 못했을 때 집안에서 유일하고 절대적인 나의 아군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나는 너무 슬프고 서러웠다. 그러나 엄마는 정정하던 할머니한테 시집살이 당하던 시절을 기억했고, 아빠는 제 어머니가 아들도 못알아본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분을 그만 보고 싶어했으며, 언니는 첫 애가 딸이라고 미친년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란걸 여직 기억해 할머니의 부재는 나를 제외한 우리 식구에게 일종의 해방감을 안겨주었던 것 같다. 게다가 나 역시 열일곱살 때, 나는 이제 '말해봤자 모른다.' 는 사실을 알만큼 알게 되어서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심지어 그때쯤엔 세상에 둘도 없이 친해진 언니에게도 얼마나 외롭고 슬픈지 자세히 털어놓지 않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다시 순진무구하게 내 편이 되어주는 우리집 강아지 얄루만이 이해 못할 내 슬픔을 따뜻하고 축축한 혀로 잔잔히 쓰다듬을 뿐이었다.


언니와 나는 그때부터 하루에 세 시간, 길게는 대여섯시간을 통화하면서 약 10년을 살았다. 언니의 남자친구는 동생과 그렇게 오래 통화한다는 사실을 계속 믿지 못하다가 나중엔 다른 남자가 있는 것 아니냐고 의심할 지경이었다. 그는 별로 다정하고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와 언니의 자매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충분히 납득 갔다. 우리도 학교를 다녔고 친구가 있었기에, 우리가 '보편적이고 일반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그걸 이해하려면 아이를 기르기에는 너무나 마음이 추웠던 어느 청년들을 이해해야 했고, 그들이 꿈을 갖고 큰 집을 진짜 자기 집으로 만들기 위해 계속 구르고 애썼던 시절을 이해해야 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사적이고, 개인적인 일이라서 쉽사리 들여다 볼 수도 짐작 할 수도 없는 수성의 뒷편과 비슷할 것이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입으로 뱉을 생각은 앞으로도 없다.


우리 가족을 그렇게 넷에서, 다섯으로 그리고 다시 둘둘로 찢어져 왕복 세 시간 정도 되는 거리에 산다. 아버지는 여전히 난데없이 터지곤 하지만 전보다 기력이 쇠해 금방 꼬리를 내리고 나는 역설적으로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장성한 청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럴때만 내가 오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나는 부모님 집에 갈 때면 이제 시간과 재산에 여유가 생긴 그분들이 그 시절 충분히 품어보지도 귀여워 해보지도 못해, 늘 목말라하시는 어리고 애교스러운 막내딸 노릇을 기꺼이 자처하면서도 조금만 내 기분이 상하면 갑자기 두 발로 서면서 '근데요 연 끊으면 그만이라서요.' 하고 쌀쌀맞게 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차갑게 선을 긋지 않으면 아직도 손발을 덜덜 떨면서 책상밑에 숨어 우는 아홉살의 내가 배신감을 느낄 것만 같다. '너도 엄마 아빠 편이야?' 라고 억울한듯 물어보면서. 그러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다큰 어른들이 좀 양보하시라는 마음으로 기꺼이 그 애 편을 자처하며 에이 그럴리가 하고 그 애를 안심시키는 것이다.


1인 가구, 2인 가구가 많아지는 도심의 상황과 저출산이 심해지는 작금의 상황이 물론 여성과 남성간의 어떤 문제에도 분명히 기인하겠지만, 더 나아가 가끔은 나처럼 자란 어린 아이들이 어린 시절 내가 바랐던 만큼의 애정과 보살핌을 누군가에게 베풀 용기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근래 문제가 되는, 내 아이만 너무 귀하게 대하는 것도 일정부분은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부모와 자식은 가장 가까운 타인인데, 나 어렸을 때는 이 말을 다들 파렴치하다고 여겼다. 부모 자식이 어떻게 남이냐고. 하지만 나는 나고, 너는 너라고 내 기끔이 네 기쁨일 수는 없고 내 억울함과 너는 별 상관이 없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면 예컨대 부모의 삶의 무게에 자식이 올라타 있는 것은 갑자기 세상에 뚝 떨어진 그 애 탓이 아니라 그 애를 세상에 낳아 이름 붙여 사람 만큼의 무게를 만들어낸 내 탓이라는 걸 이정하지 않으면 대화는 결국 같은 자리를 빙빙 돌 뿐이다. 그렇지만 이 사회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모른다. 감정적이지 않은 훈육에 방식이나 아이는 내가 낳은 순간부터 나와 다른 타인이자 한 명의 사람이라는 것을 들어본 적도 경험해 본 적도 없어 계속해서 동일시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근래 나를 좋게 보는 사람들은 부모님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나봐요 라고 칭찬하곤 한다. 비록 부모님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것도 맞고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이 요즘 최고의 칭찬임을 알고 있기에 그저 고맙습니다 하고 말지만 사실은 저 말부터, 우리 세대의 젊은 사람들이 말은 안하지만 어떤 공통의 정서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신이 낳기로 결정하여 태어난 완전한 한 사람으로서 취급을 받지 못하고, 부모의 것으로서 건강하지 못한 애정을 받고 자란 기억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결코 적지 않은 수로 있다는 걸 사실 대다수는 알고 있어서, 한편으로는 그런 스스로나 그런 식의 '서사'를 좀 지겨워 하는 정서를 말이다. '내가 사실 부모님께 사랑을 못 받고 자라서' 이런 말을 부모나 또는 살면서 주변 사람들한테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젠 동정심이 드는게 아니라 '아니 그래서 뭐 어쩌라고 너만 그랬냐고' 하고 욱하는 마음과 함께 좀 지겨운 감정이 함께 드는 것이다. 다 알고 있기에, 그래서 다들 다섯 또는 넷에서 둘 또는 하나가 됐기에.


내가 이런 글을 쓰고 나면 내 주변 어른들은 늘 나를 안타까워 했다. 그래도 부모님은 널 사랑하셨는데. 나도 안다. 동생을 가졌다는 말에 아빠가 너무 좋아해서, 내가 태어나는 날 눈이 왔는데 아랑곳 않고 동네방네 전화를 걸며 너무 예쁜 딸이 태어났다고 기뻐했다는 말을 들은 적 있으니까. 말로는 사랑한다 고맙다 말한 적 없지만 매일 새벽 새벽장을 위해 네다섯시에 집을 나서면서 어린 자식들이 어른이 되기까지 매일같이 손을 잡아보거나 뽀뽀를 해주거나 했다는 것도. 또 내 어머니가 내가 아플 때면 마치 자신이 대신 아프지 못하다는 게 원통하다는 것 마냥, 인상을 팍 찌푸리고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하고 괴로워 했다는 것도. 나는 다 기억한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고 가정을 만들고 자식을 잘 길러낼 자신이 없는 것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나 사랑으로 길렀는데도, 그렇게 외롭고 힘들지 않았는가. 그러니 두 분처럼 사랑하는 이성을 만날 자신도 없고, 하나 하나가 만나 둘이 아니라 백, 천이 되는 '가정' 이라는 것을 책임질 용기도 솔직히 아직은 없다. 알기 때문에, 삶은 사시사철 파도치는 바다와 같아서, 가정이 튼튼해도 이리 깨지고 저리 깨지는 데 그런 것 없이 알아서 살라고 한 사람을 태어나게 하는 것은 너무나 부당한 일이란 걸 알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저출산이니, 노인 빈곤의 문제니 내가 아이를 낳지 않거나 비혼을 결심하는 청년들을 안타까워 하는 만큼 더 현실적인 문제들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들이 더 중요한 가치를 수호하고 있음을 나역시 알고 있다. 그래서 어디 가서 큰 소리로는 말하지 못하고, 당당하게 신문에 기고하지도 못하고 변두리 이런 열 사람 정도나 겨우 보는 곳에 중얼중얼 적는 것이다. 용기가 없다면, 용기낼 낼 자신이 아직 없다면 그냥 좀 더 돌아가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당당하지 못한거 스스로 너무 잘 알아서 그냥 우리끼리만, 우리 사이에서나 통하는농담처럼. 넷에서 둘이어도, 하나여도. 또 가정을 낼 용기가 없어도 그럴수도 있지. 에이 어쩌겠어.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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