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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Aug 28. 2023

#7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좋아하는 것들을 왜 좋아하는지 따져보게 된 사연

지난 주에는 하루 한 번 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거진 글을 쓰지 못했다. 변명을 좀 해보자면, 새로운 학원을 다니게 됐으며 기존에 다니던 학원은 다음 주 자격증 시험만 보면 끝이라 다소 산만하게 흘러갔다. 금요일엔 김포에 가서 친구를 만났고 아울렛에 가서 여행용 가방을 하나 샀다. 이번 겨울과 다음 봄에 가족과 함께, 그리고 친구와 함께 가는 여행이 차례로 잡혔고 정신없이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숙소를 고르며 한 주를 꽉꽉 채워 썼다. 금요일엔 생에 첫 밤운전을 헀고 무서워서 육안으로도 선명히 보일만큼 벌벌 떨었다. 30분 거리를 한시간 반 동안 이리 빙글, 저리 빙글 돌며 겨우겨우 집에 도착했으나 지하주차장에 들어가다가 불법 주차중인 차를 미처 못 봐 급히 꺾는 바람에 결국 벽에 한 번 박았다. 토요일엔 대학시절 룸메였던, 친구 '수'를 만났다. 함께 저녁을 먹고 집에서 허겁지겁 내린 커피를 한병씩 들고가 근처에서 하는 무료 공연을 봤다.


고상지 트리오를 좋아한다고, 함께 보러가자는 수의 말에 조금 놀라운 기분이 들었다. 수와 나는 8년째 알고 지내고 있는데 난 그 애한테 아직도 내가 모르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어린 시절엔 왜인지 섭섭하고 아쉬운 마음도 들었을 법 한데 다행스럽게도 나도 약간은 자랐기에, 자연스럽게 그렇구나! 하고 대답하고 대신 내 안의 수라는 인물에게 '고상지 트리오를 좋아함' 이라는 설정값을 추가했다. 배우 고경표 때문인지 평소 수가 머리가 길거나 수염이 긴 락커를 좋아해서인지 무심코 남자일거라고 생각했으나 남미의 뜨거운 햇볕이 연상되는 열정이 넘치는 여성 분이었다. 수는 연주가 시작되기 전 고상지씨와 연주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는데 오늘은 평소 함께 다니던 바이올린 대신 라틴 피아노를 치는 분과 함께 나온 것 같다고 귀뜸해주었다.


반도네온이라는 악기가 존재한다는 건 알았지만 실제로 연주하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내 자리는 구석진 곳이었고 해가 짧아져 7시인데도 금새 캄캄했다. 자리가 좋지 않아 가뜩이나 고상지씨의 얼굴만 겨우겨우 보였는데, 내 앞에 엄마 아빠와 함께 온 어린 소녀가 중간부터 지루한지 펄쩍펄쩍 뛰거나 아빠를 찾아 돌아다니는 바람에 노래에 완전히 집중하기 위해선 차라리 눈을 감는 게 나았다. 하지만 그 난잡한 풍경이, 아이들은 참을성없이 소리지르며 뛰놀고 어른들은 돌계단 위에 옹기종기 들어앉아 선선한 늦여름의 바람을 맞는 8월 마지막 주의 여름이 반도네온이 내는 이국적인 노래와 제법 잘 어울렸고 꽤 낭만적으로 다가왔다. 아는 곡도 있었고 모르는 곡도 있었지만, 가사가 없는 만큼 굳이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되어서 오히려 좋았다


남미, 살면서 아직 한 번도 가본적 없고 앞으로도 갈 수 있을지 모르는 대륙. 동그란 지구본에서 대한민국 반도가 위치한 곳에 젓가락을 꽂으면 칠레로 나온다는 말을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들은 적 있다. 시차도 꽤나 나는데다가 기후도 문화도 우리 나라와는 상당부분 다른 곳의 잘 알려진 어떤 노래에 나 역시 마음이 동하고 위로를 받고 웃음이 지어지는 건 무엇 때문일까?  남미의 사랑도 지구 반대편의 것과 비슷하다는 게 당연하면서도 신기했다. 노래는 어떻게 이리도 쉽게 마음의 장벽을 넘을까. 왜 같은 노래를 들으면 우리는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걸까?


웹소설 PD로 일하면서 나는 웹소설을 읽으면 느껴지는 '재미있다는 감정'을 독자가 '어떻게, 왜' 느끼게 되는 건지 주목했다. 구체적으로는 독자와 작가 모두가 재미있다고 공감하는 '어떤 상황'을 독자들에게 '어떻게' 전달하는지에 주목했다고 말하는 것이 분명할 것 같다. 나역시 경력자라고 말하기에는 부끄러운 연차이지만, 웹소설은 독자적인 세계관 속에 사건 하나하나에, 현대의 독자들이 공감과 이해를 넘어 마침내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많은 작품들이 현대인들이 '빙의'나 '환생'을 하면서 시작된다. 현대의 독자들이 자기 일처럼 느끼게 만들어야 늦은 밤 침대에 누워서도 흥미진진한 모험을 하는 것처럼 몰입할 수 있으니까.


따라서 나도 올바른 시장 조사를 위해 재미있는 작품을 만나면 내가 왜 재미있다고 느끼는지, 이 재미는 어떤 단어들과 문장, 그리고 상황을 통해 구현되는지 재미라는 감각을 느끼기까지 어떤 감정이 내재되어 있는지 차근차근 분해해보는 걸 좋아했다. 서러움은 기대했던 애정이 돌아오지 않을 때 더 사무치는 법이다. 그래서 서자나 혼외자, 형제/자매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자식이 쌓았던 서러움을 회귀를 통해 충분한 인정과 사랑, 명예와 권위를 취함으로서 보상받는 서사가 흔한 것이다. 독자가 공감하기 너무 쉬운 서사다. 누구나 살면서 '내가 애물단지구나' 라고 느낄만한 상황은 비일비재한데, 시간과 경험을 갖고 이후 되돌이켜보면 억울한 상황을 타계할 방법이 생각보다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웹소설은 류시화 시인의 책 제목처럼 <지금 알았던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라는 상황을 전제로 시작되는 작품이 많다. 켜켜이 쌓은 억울함, 무력감 여타 그런 것들이 사실 이제와 보니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었다는 아쉬움은 모두가 가지고 있으니까.


그때 그렇게 말하지 말 걸, 그때 그렇게 행동하지 말 걸. 과거는 바뀌지 않아서 미래를 전부 알고 있는 절대자가 아닌 이상 누구나 그런 '후회의 분기점'을 갖기 마련이다. 하지만 웹소설의 주인공은 전지전능해서, '후회의 분기점'에 두번째로 도전할 기회를 쉽게 얻는다. 굳이 회귀나 빙의가 아니더라도 현대의 판타지 웹소설은 주인공에게 어떤 면에서는 신과 같은 '전지전능함'을 부여하고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이미 현실을 살아가는 무력한 우리와는 다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인공에게 몰입하고 사랑을 느끼고 공감하고 응원한다. 절대자를 보고 왜 독자들은 자기 일처럼 느끼는 걸까? 절대자가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내가 가본 적도, 가볼 수도 없는 남미의 사랑 노래를 듣고 괜스리 마음이 들뜨는 것처럼, 감정은 목표나 신념처럼 갈래가 다양하지 않고 복잡하지만 명쾌하다. 즉, 명실상부한 세계 공통어인 것이다.


나라는 사람, 나의 어린 시절과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개인적인 일화는 설명하는 나에게도 '과거'의 일이라 사실상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때가 많다.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했을까? 하는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 '현재'에 존재하는 내가 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다. 따라서 그 당시와 지금의 나를 동일한 존재로 느끼게 해주는 데에는 필시 '감정' 이라는 만능 매개체가 필요하다. 어린 시절, 아마도 3~4학년 쯤 소풍날 옆자리에 앉을 사람의 번호를 뽑는데 내 짝이 내 번호를 뽑은 일이 있었다. 나는 학교를 입학한 이래로 이렇다할 친구가 아직 한 명도 없어 점심 시간이면 매일 나무 위에 올라가 대강 시간을 떼우곤 했다. 그렇기에 내심 매일 가까이서 지내는 이와 같이 앉게 되어 설렜는데, 글쎄 그 애가 왈칵 울어버린 것이다. 나와 짝하기 싫다고.


그때 느낀 억울함, 섭섭함, 서러움, 창피함 등과 같은 감정의 팔레트는 자그마치 20년이 다되어가는 지금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물론 그때와 지금의 진폭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당시에는 이 이야기를 어디서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짝으로 뽑히면 부끄러운 사람이구나' 라는 수치스러운 감상이 나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 느낀 감정들을 고스란히, 약간은 빛바래고 덜어진 채로 갖게 된 탓에 그 때보다 그 감정에서 여유롭다. 다시 한 번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애한테 '야, 사람 창피하게 내 짝으로 앉기 싫다고 우냐? 네가 앉고 싶은 사람이 있는 건 네 사정이지. 네가 뽑은 건데 내가 미안해 해야 돼? 무례하게 짝이없네.' 라고 말해줄지도 모른다. 그리곤 창피하다고 학교를 안 가는 것도 방법이겠지. 세뱃돈을 차곡차곡 모아뒀던 저금통을 몰래 들고나와 혼자 애버랜드라도 가서 입장권만 끊고 아침나절을 돌아다니면서 이 시간도 언젠간 지나가리라. 난 알고 있다. 하고 스스로를 위로해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속 시원한 상상을 하고 나면 일견 창피해진다. 어쩌면 나한테도 시간을 돌리면 한마디 따끔하게 할 생각으로 벼르고 있는 이들이 만만치 않게 많을 테니까. 대학생 때 나는 특히 많은 사람들에게 함부로 말했는데 사실 그들이 정말 잘못했다기 보다는 그동안 살면서 쌓인 어떤 감정들, '내가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을 말해도 되는구나' 라는 어떤 깨달음을 조절 못하고 난발하고 다녔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러니 나도, 사실 그 때의 내 짝, 앉기 싫은 애를 뽑았다고 그 자리에서 왈칵 울어버리던 그 애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셈이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가 전지전능하지 않고, 한 번 한 실수를 돌이킬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 태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만일 우리에게 그런 힘이 있었다간, 계속해서 과거로만 돌아가서 마침내 현재엔 아무도 남지 않게 됐을 테니까. 따라서 한번 흘러간 시간은 빠른 파도와 같아 붙잡을 수 없으나 그 자리에 감정만 남아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도 나를 나로써, 또 나를 너로써 서로서로를 이해하고 안아 줄 수 있도록 어느 높으신 분께서 설계하셨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를 구성하는 이 많은 것들, 내가 싫어하고 좋아하고 서러워하고 기뻐하는 많은 기억들도 결국 감정이 있기에 내 안에 남을 수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런식으로 생각하고 나면 영화 <인사이드 아웃>이 사실 나의 이런 생각과 같은 귀결이 아닐까 싶다. 감정이 메인이다.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지만 그래도 누군가 나를 꼭 안아줬던 때, 만나서 반갑다고 베시시 웃었던 때의 느꼈던 기쁨 같은 것들은 내 안에 남아 슬프고 힘든 날에도 홀로 외롭다는 기분이 느끼지 않게 해주니 말이다. 사실 따지고보면 홀로 외롭다는 말도 어불성설이기는 하다. 태어날 때부터 나는 혼자였는데, 왜 하나일 때 홀로, 혼자와 같은 섭섭한 말을 쓰게 될까. 물론 이 역시 기억 때문이다. 혼자보다 둘이었을 때 느껴졌던 그 실체없는 안정감이 나로 하여금 현실을 왜곡되게 바라보도록 만드는 것이다. 1은 그 자체로서 완전한데, 우리는 자꾸 감정과 현실을 혼동한다. 그러나 누군가를 사귄다고, 결혼한다고 기본적으로 나 자체가 2가 될수는 없다. 1 + 1 이지. 나는 평생토록 1이고 당신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1을 외롭게 만드는 것, 마치 2나 3인 것처럼 충만하게 만드는 것을 찾는게 좋지 않을까.


어제는 내가 제일 존경하는 박완서 작가님의 수필집, <모래알만한 진실이라도>를 마침내 다 읽었다. 삶 앞에서 어쩌면 그리 솔직하실까. 자신의 가식을 낱낱이 분해해 이것 참 못써먹겠다. 참 이런 부분이 있었구나. 하고 논평하시는 그 솜씨는 내가 감히 닿을 수 있을까 싶은 대가(大家)의 노련함에 감탄만 나왔다. 그분을 탄탄히 이루어내는 모래알만한 진심 하나하나, 반질반질하게 닦아 분명하게 빛나는 감정 하나하나가 못내 부러웠고 나 역시 그러기를 바랄 뿐이다. 바라건데, 나를 이루는 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당신이 공감할 수 있다면, 나에게도 모래알만한 진심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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