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

by TJ

2147-03-11 23:01:44.


하린은 화면을 봤다.


[KRONOS]

현재 창 잔여 시간: 43_MIN.

다음 창: 14_DAYS.

전송 여부: 미결정.

결정 주체: KIM_HARIN(ELENA).


계산을 한 번 더 했다. 빠르게.


전송 성공 확률 97.2%. 지구-목성 편도 통신 지연 최적 창 기준 33분, 평시 43분. IAA 최적 전송 창 47분. 현재 잔여 43분. 지금 이 창을 쓰면 33분 만에 IAA — 국제천문연맹(International Astronomical Association) 공개 릴레이 채널 — 에 데이터가 닿는다.


다음 창은 14일 후. 48시간 타이머는 지금부터 46시간이 남았다.


그리고 계약 갱신 확률 2.1%.


KRONOS가 묻지도 않은 것을 먼저 출력했다. 자기 손목을 확인했다. 아니, 손목 맥박은 5회 연속이다. 다른 걸로 재야 한다. 이마에 땀이 났다. 땀샘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수동에서 능동으로.*


손가락이 마우스 위에 올라갔다.


클릭.


[SYSTEM]

IAA 공개 릴레이 채널 주소 확인 중...

수신자: IAA_RELAY_PUBLIC_OPEN_CH_04

첨부 파일: T4_ANOMALY_DATA (99.4%) / ORIGINAL_REPORT_DIFF_38 / KANG_KAI_TIMELINE_ROOT (CLASSIFIED)

전송 시작 전 최종 확인: [확인] / [취소]


클릭.


[SYSTEM]

전송 중 — 0.3%

▓░░░░░░░░░░░░░░░░░░░░


화면이 조용해졌다.


하린은 화면을 닫지 않았다.




전송 진행 표시줄이 0.7%가 됐을 때, 복도에서 방송이 들렸다.


"모든 연구원은 현재 구역에 대기하십시오. 보안팀이 구역 점검을 실시합니다. 반복합니다. 모든 연구원은 현재 구역에 대기—"


예상했다. 43분이 걸리는 건 지구 본부다. GHC 보안팀은 3분이면 충분하다.


단말이 진동했다. 긴급 채널 메시지가 아니었다. KRONOS 직접 출력이었다.


[KRONOS]

보안팀 현재 위치: B구역 복도. 이동 방향: 연구실동.

탈출 경로 계산 완료.

예측 교차 시간: 112초.

여유 없음.


경로: 연구실 → 비상구 C-7 → 환기 통로 → 공용 창고 구역 B-12.

조명 제어: 대기 중.

잠금장치 C-7: 해제 완료.


하린은 단말을 집어 들었다. 재킷을 입을 시간도 없었다.


[KRONOS]

조명 전환: 실행.


복도 절반이 꺼졌다.




비상구 C-7은 제어실 동쪽 끝이었다. 하린이 복도 모퉁이를 돌 때, 반대편 복도에서 장화 소리가 들렸다. 단단하고 리드미컬한 소리였다. 세 명, 아니 네 명. 훈련받은 걸음이었다.


단말 화면이 다시 떴다.


[KRONOS]

우측 카메라 루프 재생 중. 12초.

빠르게.


달렸다.


비상구 문이 이미 열려 있었다. 잠금 표시등이 초록색이었다. KRONOS가 먼저 해제했다. 문을 밀고 들어가자 서늘한 금속 냄새가 코를 찔렀다. 환기 통로였다. 앞이 어두웠다.


단말 불빛으로 방향을 잡으며 걸었다. 빠르게, 하지만 소리 없이.


단말에 메시지가 왔다.


[KRONOS]

보안팀 연구실 진입: 확인.

하린의 현재 위치: 카메라 사각.

공용 창고 B-12까지 잔여 거리: 73m.


73m.


[KRONOS]

전송 진행률: 11.4%

잔여 시간: 약 28분.


28분이면 이 창고 안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공용 창고 B-12는 예비 장비를 쌓아두는 구역이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비상 조명이 주황빛으로 깜박였다. 산소 탱크 상자 뒤에 자리를 잡고, 스마트폰을 꺼내 전송 진행률 화면을 미러링했다.


전송 중 — 11.4%

▓▓░░░░░░░░░░░░░░░░░░


조용했다.


숨을 내뱉었다.


아드레날린이 빠지면서 손이 떨렸다.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귀 뒤로 단발머리를 쓸어 넘겼다.


지금 이 데이터가 지구에 닿으면 IAA는 이것을 공개 채널에 올린다. GHC가 법적으로 차단하려면 IAA 측에 삭제 요청을 해야 하고, 그 절차는 최소 72시간이다. 그 72시간 동안 지구의 누군가가 데이터를 읽는다.


한 명이면 충분하다.




스테이션 전체 방송 채널이 켜진 건 그로부터 7분 뒤였다.


목소리를 즉각 알아봤다. 한수인 박사였다.


"ARIA 스테이션 전체 직원 여러분. 저는 수석 대기과학자 한수인입니다."


음성이 차분했다. 안경을 고쳐 쓰는 소리가 스피커 너머로도 거의 들릴 것 같은 목소리였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학술 자율성이 어디까지 지켜져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저는 이것이 기록으로 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방송 채널 특유의 공기. 800명이 동시에 이 침묵을 듣고 있었다.


"저는 이 스테이션의 대기 데이터 원본과 제출된 보고서 사이의 불일치 38건을 확인했습니다. 기간은 35개월. 방향은 단방향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조작의 지시 계통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린은 숨을 참았다. 한수인이 직위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 귀에 걸렸다.


"GHC — Ganymede Holdings Corporation의 ARIA 스테이션 60% 출자 조항은, 이 스테이션에서 생산된 과학 데이터를 기업 이익에 따라 편집할 권리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계약에 명시되어 있다고 해도 학술 진실성은 계약 상위 개념입니다."


방송이 끊겼다.


5초 뒤 역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방송 중단 명령이었다. 조금 빨랐다. 하지만 한수인은 이미 끝냈다.


창고 밖 복도에서 발소리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보안팀 대원 하나가 방송을 들으며 발걸음을 늦춘 것 같았다. 30초쯤 지나 다시 발소리가 이어졌다. 방향이 바뀌었다.


연구실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가고 있었다.




스마트폰 화면을 봤다.


전송 중 — 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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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절이 넘었다.


서진우가 TRB-09 탐침 데이터를 삭제하는 걸 봤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났다. 화가 났다. 그 이전에 —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느낌이 먼저 왔다. 서진우가 그 버튼을 눌렀을 때, 눈이 화면을 보고 있었다. 표정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오래된 습관인지.


3년 전 카이도 이랬을까.


TRB-09 수동 프로그래밍 세션. 23분. 847개 패킷. 카이는 그때 이 데이터가 언젠가 누군가에게 닿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그냥 남기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을까.


단말에 메시지가 왔다.


[KRONOS]

박준서 역장, 지구 본부 긴급 통신 시도: 확인.

편도 지연 33분 기준 — 현재 지구 본부는 전송 사실을 인지하지 못함.

GHC 지구 본부의 최초 가능한 대응 시점: 전송 완료 후 최소 43분.


지구가 이 데이터를 봤을 때는 이미 끝나 있다.


수동이 아닌 능동. 기다리지 않았다. 이미 해버렸다.


하린은 입술을 달싹였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괜찮다. 혼자 있다. 말할 필요 없다.


전송 중 — 63.7%


창고 조명이 주황색으로 깜박였다.


산소 탱크가 차갑고 금속 냄새를 풍겼다. 바닥의 그리드 패턴이 규칙적이었다. 하린은 패턴을 세다가 멈췄다. 이건 필요 없는 계산이다.


필요한 계산이 하나 있었다.


계약 갱신 확률 2.1%라는 건 KRONOS의 추정값이었다. KRONOS가 계약 해지 위험을 2.1%로 *낮게* 본 건지, 아니면 갱신 가능성을 2.1%로 *극도로 낮게* 본 건지 잠깐 헷갈렸다가 — 갱신 확률이 2.1%였다.


그러니까 계약 해지 확률은 97.9%.


*나는 계산했다. 그래도 눌렀다. 그게 다였다.*




35분이 지난 시점에 KRONOS 출력이 하나 왔다.


[KRONOS]

전송 진행률: 89.5%

잔여 시간: 3분 41초.


3분 41초.


하린은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스마트폰을 두 손으로 잡았다. 화면이 너무 밝아서 눈이 부셨다. 밝기를 낮출 여유가 없었다.


전송 중 — 92.1%

▓▓▓▓▓▓▓▓▓▓▓▓▓▓▓▓▓▓░░


전송 중 — 95.8%


전송 중 — 98.3%


숨을 참았다.


전송 중 — 99.1%


[SYSTEM]

전송 완료.

─────────────────────

수신자: IAA_RELAY_PUBLIC_OPEN_CH_04

전송 시각: 2147-03-11 23:44:18

첨부 데이터 무결성: 99.97%

IAA 릴레이 수신 확인 대기 중...


기다렸다.


33분.


화면이 바뀌었다.


[IAA 공개 릴레이 — 수신 확인]

수신 시각: 2147-03-12 00:17:22 (UTC)

송신자: ARIA_STN_TERMINAL_T-07_KIM_HARIN

데이터 무결성: 99.97% — 확인

상태: 공개 채널 등록 완료


하린은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산소 탱크가 여전히 차가웠다. 바닥이 딱딱했다. 창고 조명이 주황색으로 깜박이는 주기가 규칙적이었다.


닿았다.


지구에 닿았다.


데이터 무결성 99.97%.


단말을 들어올리려는데 KRONOS 출력이 떴다. 수신 확인 메시지 이후 첫 번째 자발적 출력이었다.


[KRONOS]

응답 지연: 2.1초


2.1초. 표준이 0.3~0.5초니까 이례적이었다. 뭔가를 처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KRONOS]

STORM CORE 신호 모니터링 데이터 업데이트 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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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신호 공명 주기

이전값: 89.4초

현재값: 44.7초

변화량: -44.7초

감소율: 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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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감쇠 패턴 해당 없음.

열역학적 주기 변동 해당 없음.

장비 보정 오차 범위 초과 — 장비 오류 제외.

해당 데이터의 원인 분류: 불가.

─────────────────────────────────────────

뭔가 응답하고 있다.


하린은 화면을 봤다.


89.4초. 그것이 44.7초가 됐다.


정확히 절반.


자연 감쇠가 아니다. 장비 오류가 아니다. KRONOS가 원인을 분류하지 못했다. KRONOS가 "해당 데이터 부족"이라고 쓰지 않고 분류 불가라고 썼다는 건 — 데이터는 있다는 뜻이었다.


데이터가 있는데 KRONOS가 모른다.


손가락이 단말 모서리에 멈췄다. 이마가 차가웠다. 조명이 깜박였다.


89.4초. 소수였다. 44.7. 89.4의 절반. 더 빠르게 반응하고 있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뭔가 응답하고 있다.`


KRONOS도 몰랐다.


하린은 단말을 내려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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