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우월주의가 걱정 되는 1인
질문1. 특정 상황과 관계 속에서 '손상'은 장애가 될 수 밖에 없는가?
질문2. 흑인은 검은 피부 때문에 '노예'가 되었나?
5월 12일(토) 인권강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난 이 두가지에 대해 질문할 예정이다.
사람들은 질문 받기를 거부하려는 경향이 있다. 내 눈을 피하거나 묵비권을 행사한다. 그러나 내 질문의 어떠한 답이 나오기 전까지, 나의 교육은 이날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인권강사를 준비한다는 장애인 당사자는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하는 교육자료는 참 잘쓴다. 나 또한 그렇다. 그것은 장애인 당사자만의 달란트다.
장애관련 정책이든 인권이든 인식개선이든. 장애인 당사자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전문성을 담보로 한다.
나는 사람들에게, 또는 패북에 장애는 '손상'이 아니라 말했다. 그럼에도 질문1에 대한 대답에는 'Yes' 라고 말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놈에 패러다임, 장애인복지 패러다임 변화에 묶여서 본질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늘상 "장애는 손상이 아니라 정체성이다" 라는 말로 시작한다면 장애인 당사자로서의 전문성을 의심해 봐야한다고 본다.
상황에 따라 손상으로써 접근 할때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기존 의학적 학문 혹은 그 이전의 걸쳐진 고전 학문에 대한 "존재의 부정"이 아닌가. 장애는 감수성이 아니다, 인권도 감수성이 아니다. 민감성이다.
감수성은 인문학에서 찾아야지 사회학에서 찾지 말자. 우리는 질문1의 '손상'에 대한 고민보다 질문2의 '흑인' 에 대한 답을 찾고자하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본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노예가 된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한 방법. 그것이 인권이든 정책이든 어떠한 '포괄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 같다'라는 정도에 대답은 듣고 싶다. 그것이 선명한 정답은 아닐지라도 그것을 향해 가야한다고 믿는다.
장애학에서 흑인 인권운동에 주목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본다. '흑인임을 사랑'하라고 말했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이 빛나는 이유는 흑인들 에게 '감수성'을 자극하려는 의도가 아닐 것이다. 또한 흑인의 가치 또한 백인과 동등하단 것이지 '흑인이 백인보다 더 가치롭다.' 라는 의미도 아닐것이다.
나는 장애인 당사자의 교육안에 '손상'을 '감수성'으로 포장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에 대해 인정하고, 손상에 대해 어떠한 환경에서도 동등한 위치로 서게하는 방법으로써 우선 시 되는것, 비장애인 보다 '월등함'이 아닌 '동등한' 가치를 지향하기 바란다.
머지않아 '장애 우월주의'에 빠져버릴 것만 같아서다. 그래서 결국 나와 마주보는 세상 사이로 박힌 장벽만 더 견고해질 것 같다.
공공장소나 엘리베이터, 자동차에 간혹 붙어있는 "장애인 먼저" 라는 문구가 "장애인도 같이" 라는 문구로 수정되기를 희망한다. '같이'라는 단어에서 월등함이 아닌 동등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름 최충일.
집에서는 "아빠, 남편, 아들"이고
직장에서는 사회복지사 또는 "최 선생님",
무대위에선 "엄지왕자",
친구들은 "쪼까니"(키가 작아서)라 부른다.
그리고 지체2급 장애인이다.
사람들은 살면서 다양한
호칭과 별명을 갖는다.
그러나 "장애인"은 내게
호칭도 별명도 될수 없는 단어다.
어릴때 동네 꼬마들이 놀릴때 빼고는...
평소 사람들이 "장애인 안녕?"
이라고 한적은 없었다.
"장애인"이란 단어는 나의 삶가운데
지극히 한정된 상황에서만 불려지는
어색한 "middle name"이다.
중고등학교를 특수학교에서 졸업,
대학생활 힙합에 빠졌고 지금도 사랑한다.
직장이 있고 결혼하여 아빠가 되었다.
삶의 행복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싶다.
장애인이 아닌 아빠,남편,래퍼,직장인,아들로써...
삶의 다양성과 일상을 계속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