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M은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M은 평생 한 번도 범법 행위를 한 적 없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물론 절체절명의 상황(예를 들면, 전철을 놓쳐 약속에 늦게 되고, M의 신뢰도에 치명상을 입어 일이 성사되지 못한 결과로 M의 우울증이 재발하고, 그로 인해 가족들의 삶은 암흑기로 접어들며, 힘들 땐 먹지 않는 습성이 있는 M이 뼈만 앙상하게 남아 급기야 목숨이 오가는 위험천만한 상황에 처하는)에 어쩔 수 없이 무단횡단을 했던 것까지 포함한다면 얘기가 다르지만.
여하튼 대부분의 삶에서 모범적이고 양심을 지키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큰 부끄러움은 없었단 말이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내가 그렇게 쓰레기는 아니라는, 오히려 보통 사람들보단 좀 낫지 않나하는.
적당히 친절하고, 도와달란 사람 있으면 도와주고, 내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 사람.
그 정도면 괜찮다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 M은 자신의 실체를 보고 말았다. 이런 자부심이 산산이 부서졌음은 물론이다.
부산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KTX를 탔다.
버스의 2배 가까운 비싼 비용을 치르고 기차표를 끊은 이유는 작업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버스에서는 잠자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그저 ‘실려’갈 뿐이지만 KTX에서는 책을 읽어도 속이 울렁거리지 않을 정도의 매너 있는 승차감을 누리며 읽기도, 쓰기도 할 수 있다.
게다가 비록 초소형이긴 하지만 테이블까지 있다.
이동 수단에서 개인 데스크라니. 감격스럽지 아니한가.
나는 즐겁게 작업할 생각으로 시간의 여유를 두고 탑승했다.
자리가 좁아서 짐들은 다 위에 있는 짐칸으로 올려야 했다.
내 자리는 창 쪽이었고, 창가 자리는 맘 편하게 왔다갔다 하지 못하므로
통로 자리에 사람이 오기 전에 모든 것을 다 꺼내어 세팅해두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하필이면 옆자리 사람이 나보다 더 부지런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다른 자리는 아직 텅텅 비어있는데 내 옆자리 남자만 일찍 와서 앉아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내 무거운 가방을 열어 짐을 정리할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다행히 뒷자리는 아직 비어있는 상태였으므로 거기다 가방을 내려놓고 물건을 꺼냈다.
노트북과 충전기, 읽을 책, 다이어리, 생수, 오다가 사온 에그타르트까지.
그런데 그러는 도중 좌석 등받이에 기대어둔 텀블러가 쓰러져 소리소문 없이 커피가 흘러나오는 참사가 발생했다!
오 마이...!
등받이 바로 아랫부분이 젖어버렸다.
잽싸게 짐들을 치우고 커피를 닦았다.
쏟거나 흘리고 부딪히는 일은 나에겐 너무나 익숙한 일이라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사는데 이 경우는 나도 당혹스러웠다.
왜냐면 이 사건의 피해자가 내가 아니라 모르는 사람의 엉덩이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KTX 좌석은 버스와 달리 천으로 되어있다. 닦아도 이미 젖은 자리가 바로 마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 열심히 닦았다.
그런데 갑자기 내 머리가 이상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빨리 닦고 범행현장을 피해야 하지 않을까?’
‘이러고 있는데 좌석 주인이 오면 너무 민망하잖아.’
‘의자 안쪽 깊숙한 곳만 젖었으니까 괜찮을거야.’
나는 그런 나의 합리적인 생각에 주저없이 복종했고 서둘러 상황을 정리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 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완전범죄가 될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기차를 타기 시작하자 이유없이 불안해졌다.
닦느라고 닦았지만 모르고 앉으면 젖을 수도 있는데... 누군지 모르지만 엉덩이를 앞쪽으로 빼고 앉아야 될텐데...
나의 뇌가 아까랑 다른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몇 분 전 내 속에서 일어난 비겁하고 찌질한 생각을 다시 정면으로 쳐다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사고 쳐놓고 혼날 것이 무서워 도망친 어린애 같은 행동을 했던 거야?
내 실수의 결과를 남이 당하게 해놓고 모른 척 편히 있을 생각을 하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책임을 져야 하고, 욕을 들어야 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나는 계속 목을 빼고 승차하는 승객을 지켜보았다. 30대 정도로 보이는, 트렌치 코트를 입은 여성이 뒷자리로 들어가려 했다. 나는 서둘러 그를 불렀다.
“저, 이 좌석에 앉으시나요?”
“네? 네.”
“아, 저... 제가 그 자리에서 짐을 정리하다가 실수로 커피를 쏟았는데 많이 흘린 건 아니고... 닦긴 했는데 혹시 축축할 수 있어서요. 원하시면 자리를 바꿔드릴게요. 죄송합니다.”
여자는 당혹스러워 하며 한숨을 쉬었다.
“아니, 왜 남의 자리에서 짐 정리를...”
“죄송합니다. 자릴 바꿔드릴게요.”
여자는 굉장히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바꿀 생각은 없구요... 여기 전원콘센트 쓰려고 일부러 잡은 건데...”
“어...여기 앉으셔도 뒤로 연결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여자는 대답은 하지 않고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연신 한숨을 내쉬며 자기 자리에 들어가 앉았다.
“휴지 더 없어요?”
“아, 예... 이게 다라..”
나는 가지고 있던 손수건을 주었다. 여자가 또 한숨을 쉰다.
“이것도 젖었네.”
젖은 것은 아니었다. 아까 닦은 휴지와 같이 있어서 살짝 촉촉했을지는 모르지만.
여자는 계속 한숨을 쉬었고 중간중간에 잘 들리지 않는 중얼거림은 나를 향한 욕이라고 추정되었다.
그 때, 나는 또다시 올라오는 내면의 소리를 들었다.
‘아니, 자리 바꿔준다는데 자기가 싫다고 해놓고 계속 저러냐... 바꿔준다잖아... 이렇게까지 미안하다는데...’
내가 이런 소릴 지껄이는 걸 보니 충분히 잘못했다고 느끼지 않는 게 분명했다.
의도한 게 아니었으니 나도 그냥 운이 나빴던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도 몰랐다.
따지고 보면 나도 운이 나빴고 너도 운이 나빴을 뿐이잖아, 그러니까 나쁜 놈은 ‘운’인 거지... 뭐 그런 비겁한 생각.
하지만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용서를 구하는 행위는 상대방의 마음이 풀어지도록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마땅히 동반해야 한다.... 고 M이 말했다.
나는 마음을 바꿔먹고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여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고 한숨 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아마 여자도 삶이 힘겨운가 보다 생각했다. 실수한 상대방의 민망한 마음까지 헤아려줄 여유는 없을 만큼.
나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반응했고 그러자 한결 담담해졌다.
이제 이 사건으로 생긴 감정의 여파는 그녀에게만 남아있게 되었다.
물론 도착 안내 방송이 나오자마자 재빨리 일어나 튀어나가긴 했다.
내릴 때 마주치면 다시 그 한숨 소리와 짜증 가득한 눈빛을 마주하게 될까봐.
요즘 내가 제법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다가 뒤통수를 맞는 일이 잦다.
혹자는 그 정도는 큰 잘못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유난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쉽게 사는 법은 애초에 꿈도 꾸지 못한다.
M과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소속 아티스트 M은 완벽주의자에 무엇이든 순도 100프로를 지향하는 비현실적인 인간이다.
어쩌면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
M과 사이가 안 좋아지면 나만 힘들다.
M이 나를 볼 때마다 인상을 쓰고 노려보거나 자아비판으로 시커먼 암굴을 만드는 것을 막으려면 이런 사건들은 최대한 양심적으로, 높은 기준으로 정리해야한다.
M은 나이가 들수록 맑아지고 더 순수해지는 게 꿈인 자이다.
알고 있다. 굉장히 비현실적인 희망이란 것을.
가끔 내가 말한다.
‘그거 가능성이 희박한거 알지?’
그러면 M이 대답한다.
‘응. .....그래서 뭐?’
‘......’
할 말이 없다.
나는 상식이란 것이 무엇인지 도대체 모르는 M이라는 걸 잠시 잊었다며 고개를 돌리고 M의 마지막 한 마디가 들려온다.
‘노력도 못해? 내 맘이야!’
그래, 혹시 모르지 않는가.
언젠가 정말로 순수하고 올곧은 양심을 가진, 여전히 진실에 올인하는 희귀종 할머니가 베시시 웃으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어쩌겠는가.
M을 위해 겸손히, 부지런히 마음을 살피며 살 밖에.
오늘, 자신에게 실망했다기보다 그 찌질함에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던 M은 그렇게 낙담하진 않은 모양이다.
단지 더욱 긴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아마도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참
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