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에서나 봤다.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구역’을 하거나 ‘구토’를 통해 임산부임을 입증하는 입덧이나, 먹어도 먹어도 멈출 수 없다는 먹덧이나 모두 다 미디어를 통해서나 봄직했고 나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남편이 먹고 싶다는 거 새벽에 막 구해오고 그래?”
아니 나도 그 시간엔 자야지
전체 임신부의 7-80%가량이 겪는다는 입덧이 다행히도 내게는 없었다.
딱히 임신을 핑계로(?) 남편을 테스트해 볼 만한 구색은 갖추지 못했지만 직장생활을 하는데 또 이만한 특혜가 어딨을까 싶다.
그런데 식사하는 장르가 바뀌기 시작한다
한식을 좋아하는 나는 철저하게 김치가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하는 주읜데, 햄버거를 사 먹기 시작한다. 갑자기 꿀맛이다. 밥보다 패스트푸드가 더 좋은 남편은 세상에 로또 맞았다. 마누라가 햄버거를 먹자니!
식사 사이 보통 과일로 중간 간식을 먹는 습관 역시, 이제 더 잦은 ‘상시’로 텀이 줄었다.
(뭐든 그냥 먹고 싶은 건 잘 먹으면 된다고 생각했지 이 사태가 아이를 우량아로 키우게 되는 복선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렇게 나는 무던한 임신 초기를 보낸다.
“제수씨는 좀 어때? 입덧은 괜찮아?”
응 뭐 그런 유난 없고 괜찮네~
그렇다,
우리 남편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
입덧 안 하면 임신부도 야근해도 되나요?
(임신부는 초기 12주 차 까지, 임신 후반기 36주 차부터 4주간 총 16주의 근로시간을 2시간 단축할 수 있다)
금융업계에서 근무한다.
Sales 팀장 영업직에서 Backoffice로 근무 형태만 바뀌었을 뿐 실적에 대한 압박은 여전하다.
실제 영업전선에 있지 않는 우리지만 그들을 관리 하고 지원하는 입장이다 보니 실적이라는 숫자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도 있는 거다.
매 일이, 매 월이 숫자 전쟁이다.
과장 달아줬고 책임자 앉혀 놨더니 임신으로 뒤통수를 쳐버린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축근무 사용을 하지 않는 것이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숫자가 얄팍한 나의 단축근무 시간을 포기한들 맞춰질 리 만무하지만, 나는 절대 안 볼 줄 알았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사실 돌이켜 보면 아무도 눈치 주지 않았다.
나의 단축된 퇴근시간에 대한 개념들이 없을 뿐, 그 시간에 나 하나쯤 사라지는 것은 회사가 돌아가는데 0.0000001도 지장이 없다는 걸 그저 스스로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대표님 이세여?)
컨디션은 슬슬 좋아지는데 이거 뭐 쾌재를 부르며 바빠 죽겠는 틈새로 혼자 퇴근하려니 영 뒤가 구려서 나 편하자고 단축근무를 포기한 거다.
중요한 건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른다.
말 안 하면 야근까지 시킬 각이다.
그렇다고 나의 이 같잖은 열정이 고과에 도움될 리 없다.
그저 난 회사에서 단축근무가 가능한 주차의 임신한 여자 과장일 뿐이다.
“애기 생각해야지~”
뭐 먹는 건 다 잘 먹어도 양껏 먹지는 못하는 상태고(약간의 소화불량과 변비님 강림), 한 몸에서 심장이 두 개나 뛰고 있으니 힘에 겨워 뭐 좀 수척해 보일 수도 있겠으나, 정작 임신한 나보다 옆에서 무지개 빛깔 시누이 멘트들로 더 유난이다.
없던 관심도 생기게 하는 게 임신부인가?
갑자기 임신부터 출산의 라테 얘기까지 속출하고,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라며 회사는 갑자기 산모교실이 열린다.
(저 지금 근무 중입니다만!!!!)
애기 생각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걱정 붙들어 매시고 일이나 합시다.
안정기까지는 무리하지 말고 조심하세요
임신 사실을 확인하고, 2주 뒤에 찾아가 처음으로 심장소리를 들었을 때,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3미리 남짓의 작는세포의 우렁찬 울림을 기억한다.
믿기지가 않는다.
너무 작아서 혹시라도 먼지처럼 사라져 버릴까,
믿기지가 않아서 이 작은 불씨가 꺼져 버릴까,
준비하고 기다렸던 게 아니라고 거짓말처럼 한낱 꿈이 되어 버릴까 봐.
병원 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아무 티도 안나는 똥배를 비지적 거리며 기도했다.
그대로 거기 잘 있어달라고..
그리고 또다시 2주 뒤,
너는 손, 발이라는 네 개의 꼭짓점으로 인사한다.
초음파를 같이 보던 남편은
“팔, 다리만 보이는거 보니까 딸인가봐요!!”
큰 웃음 선사.
그래 엄마도 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