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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밋너 Aug 14. 2023

울고 넘는 박달재가 아니라, 울고 넘는 한라산(1)

2021년 3월 27일-그날, 안개 낀 516도로의 악몽

나는 운전을 좋아한다. 장롱면허 생활 8년 만에 첫 차를 마련한 이후, 내 작은 붕붕이를 타고 전국팔도를 누비며 출장을 다니는 사이 운전에 재미가 붙었고 그 뒤로 해외로 여행이나 출장을 가서도 스스럼없이 렌트해서 차를 몰고 다닐 정도로 운전 자체를 즐기게 됐다. 물론 시행착오도 있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데, 차를 사고 연수를 받은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인천공항으로 인터뷰를 하러 갈 일이 생겼다. 손연재의 귀국 인터뷰였는데 비행기 도착 시간이 새벽 6시 경이어서 적어도 5시 30분에는 인천공항에 도착을 해야하는 일정이었다. 차가 없었을 때라면 눈을 비비면서 공항 리무진 버스 첫차를 타고 갔겠지만, 운전도 배웠겠다 차도 있겠다, 호기롭게 나는 4시에 일어나 차를 끌고 인천공항을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 외곽순환도로(현재는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로 진입하는 길을 잘못 들어 한새벽 휑뎅그렁한 교차로에서 달달 떨며 유턴을 하고, 다시 유턴을 해서 겨우 외곽순환도로를 탄 걸 시작으로 수많은 난항을 겪었고, 울고 싶은 기분으로 50분이면 갈 거리를 1시간 30분이나 걸려 도착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바보 같은 추억이지만 원래 초보운전이라는 게 다 그렇지, 뭐! 하며 하하 웃고 넘길 이야기들이다. 


운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초보 시절의 아찔했던 경험은 물론, 경력이 어느 정도 쌓인 후에도 시시때때로 벌어지는 가슴 철렁했던 순간에 대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사고의 순간, 혹은 사고로 이어질 뻔한 순간, 사고는 아니어도 심장 쿵쾅대는 순간, 순간들. 그리 길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짧지만도 않은 지금까지의 운전 경력 중에서 내가 경험한 가장 절망적인 공포는 바로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를 하던 때, 안개가 자욱하게 낀 516도로에서 시작됐다.


위키피디아


516도로. 1131번 지방도로라는 공식 명칭이 있음에도 여전히 516도로로 불리는 이 도로는 그림에서처럼 한라산을 바짝 끼고 제주시와 서귀포를 수직으로 잇다. 그래서 가칭으로 한라산 횡단도로라고도 불렸다는 거 같은데 내가 제주를 오가면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들 사이에서 이 도로는 언제나 그냥 516도로였다.


보통 제주에서 서귀포로 내려올 때는 시간이 여유로운 경우 서쪽 애월-안덕 쪽을 완만히 도는 평화로 코스를 타고 들어오는데 가끔 516도로를 타게 되는 경우가 있다. 운전에 맛들여 멋모르고 렌트해서 다니던 초짜 시절, 제주에서 516도로를 타고 내려오며 만난 숲터널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네비가 평화로를 안내해도 굳이 무시하고 516도로를 타고 내려가기도 했다. 그땐 구불구불하고 험한 516도로가 마냥 재미있기만 했었지. 내심 516도로를 달리면서 초보들 특유의 자만... 아니 오만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합하겠다. 오만에 빠져 '나 운전 좀 제법 하는데?' 같은 허세에 빠져 있었는지도 몰랐다(물론 지금은 무척 부끄러워하며 반성하고 있다.)


사실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를 하면서 가장 많이 달라진 건 나의 운전습관이다. 흔히 제주도를 두고 초보가 운전 연습하기 좋다고들 하는데,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지 한 달 체류하는 동안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렌트카로 종횡무진 제주도를 휩쓸고 돌아다니는 여행자들 중 초보들이 압도적이고, 교통사고도 많이 낸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었지만 정작 내가 머무르면서 그런 운전들 때문에 곤욕을 치르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방어운전을 하게 되더라는 이야기다. 중산간 도로를 넘어오는 길에 속도도 줄이지 않고 불쑥 튀어나온 렌트카 때문에 사고 직전까지 간 적도 있고, 신호등이 없는 사거리에서 눈치도 보지 않고 밀고 들어오는 좌회전 차량에 들이 받힐 뻔한 적도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이 때문에 조심조심 운전하는 습관이 들어, 한 달 살기 전 육지에서 35점대를 맴돌던 T맵 점수가 한 달 살기 후에는 87점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단언컨대, 이 모든 경험 가운데서도 비 오는 날, 안개 낀 516도로를 달렸던 그날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내 운전 습관은 결코 개선되지 않았으리라. 어쨌든, 그날의 공포스러웠던 기억을 채 다루기도 전에 사족이 너무 길어져서; 수십 번도 더 지나다녔던 516도로의 눈물나게 특별하고 공포스러웠던 주행기는 다음 편에서 마저 이어 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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