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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Jun 04. 2021

하루키 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속 재즈

냉동되어버린 세월, 냇 킹 콜, 듀크 엘링턴, 찰리 파커에 대하여



냇 킹 콜의 South of the Border


그의 최신 단편집인 '일인칭 단수'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음반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은 학창 시절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란 가상의 앨범에 대한 미사여구 가득한 평론을 썼고 이 사실은 졸업과 함께 머릿속에서 잊힌 채 오랜 시간이 흐른다. 낭만과 조크가 넘쳤던 풋풋한 가상의 평론은 모래알처럼 무미건조한 어른의 삶 속에 파묻혀 존재조차 잊혔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은 뉴욕의 어느 레코드 가게에서 실제로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란 앨범을 발견하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예상할 수 있듯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음악이 담긴 불가사의 한 앨범과의 신비한 조우는 다음 날 꿈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 이야기를 읽는 순간 이 내용은 소설이 아닌 하루키의 실제 경험담이 아닐까? 란 생각이 들었다. 하루키는 냇 킹 콜의 깊고 진한 낭만이 담긴 황금빛 목소리를 좋아했고 언젠가 들었던 'South of the Border'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을 썼다고 했다. 또한 소설 속 시마모토의 집에는 냇 킹 콜의 앨범이 놓여있고 훗날 두 사람이 재회 후 추억을 이야기할 때 그 앨범은 재등장한다. 냇 킹 콜의 노래는 책의 제목이자 소설의 중요한 장치이다. 하지만 사실 냇 킹 콜은 실제로 이 곡을 부른 적이 없다. 하루키 역시 착각이긴 하지만 존재하지 않은 것에 영감을 받아 세상에 없던 소설을 완성시킨 것이다. 그래서일까,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특유의 희뿌연 물안개 같은 분위기와 실존하지 않는 것을 쫒는 외로운 두 사람, 하지메와 시마모토의 관계가 세상에 없는 곡 속에서 더욱 기묘하게까지 느껴진다.

실제 'South of Border'란 곡은 멕시코에 대해 노래했다. 하나 소설 속 시마모토와 하지메에게 국경의 남쪽이란 장소는 실체를 알 수 없지만 아련한 그리움이 묻어난 경험하지 못한 과거 혹은 미래, 영원히 갈 수 없는 존재하지 않는 장소다.



 

냇 킹 콜의 팬이 냇 킹 콜이 부르는 것을 상상하며 부른 'South of Border'



듀크 엘링턴 - The Star-Crossed Lovers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은 내가 하루키의 소설 중 두 번째로 좋아하는 장편이다. 첫 번째는 물론 '노르웨이의 숲'이다. '노르웨이의 숲' 속 나오코가 19살에 죽지 않았다면, 독일행 비행기를 탄 37살 와타나베는 시마모토와 하지메 같이 운명 같은 재회를 하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두 소설이 비슷한 분위기의 외로움을 안고 있기 때문일까? 나는 노르웨이의 숲 속 달콤한 환상 속을 빠져나오기도 전에 국경의 남쪽까지 끝없이 끌려가 버리고 말았다.


하지메와 시마모토는 형제가 없다는 것이 희귀하던 시절, 외동아이란 공통점이자 같은 결핍으로 묶였고 함께 음악을 듣고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열두 살에 첫사랑을 경험한다. 하지만 다른 중학교에 들어가며 미묘한 연령의 고비와 사춘기를 맞이한 두 사람은 물리적으로 멀어진 거리만큼 자연적으로 멀어진다. 

두 아이의 아빠가 된 하지메가 서른여섯 살이 되던 해, 하지메의 재즈바는 잡지 <블루터스>에 소개되고 그 잡지를 본 시마모토가 그의 바를 찾아오며 어린 날의 첫사랑은 다시금 재회한다. 


20살, 나는 학교 앞 카페에 비치돼 있던 이 책을 읽었다. 하지메와 시마모토가 재회할 때 재즈바의 피아니스트는 스타 크로스드 러버스(The star-crossed lovers)의 도입부를 치기 시작한다. 이 책을 읽은 이후 듀크 엘링턴의 스타 크로스드 러버스란 곡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애절하고도 안타까운 사랑을 대표하는 대표곡으로 자리 잡게 됐다.

스타 크로스드 러버스. 엇갈린 별자리 아래 태어난 비운의 연인들. 로미오와 줄리엣을 뜻하기도 하는 이 곡은 듀크 엘링턴과 스트레이호가 온타리오의 셰익스피어 페스티벌에서 연주하기 위해 만든 곡이라고 한다. 로미오 역의 테너 색소폰, 줄리엣 역의 알토 색소폰이 우아하게 어우러진 아름다운 연주곡 스타 크로스드 러버스. 은하수처럼 섬세하게 흩뿌려지는 피아노 건반 소리로 시작되는 이 곡을 듣고 있을 때면 나는 언제나 하지메가 운영하는 가상의 재즈바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위스키 한잔을 홀짝이는 상상을 한다.


그 무렵에 듣는 음악 한 음 한 음이, 읽는 책 한 줄 한 줄이 몸속으로 스며 들어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신경은 송곳처럼 예리해서, 내 눈은 상대를 찌를 듯한 날카로운 빛을 담고 있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스타 크로스드 러버스>를 들으면, 나는 언제나 그 무렵의 나날과 거울에 비친 내 눈이 떠올랐다.


듀크 엘링턴 - The star-crossed lovers


냉동되어버린 세월을 의미하는 재즈 


이 책을 처음 읽었던 20살 그 시절 나는 큰 꿈도 용기도 없는 고분고분하고 야망 없는 학생이었다. 나는 그들처럼 외동도 아니고 시마모토처럼 다리를 절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는 어린 시절 겪은 가난, 애절하거나 간절함이 없는 마음, 무언가를 스스로 선택한 적 없는 인생을 가졌다는 것 자체로 스스로의 결핍이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책임감 강하고 순종적인 맏이였던 나는 외동은 아니지만 가족 사이에서 늘 알 수 없는 무게와 외로움으로 뭉쳐져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어렸지만 내가 지나쳐온 유년 시간 속에 상실은 컸다.

이 소설을 처음 읽던 나는 재즈를 몰랐다. 그럼에도 그들이 듣는 이 사랑의 노래는 내 인생에도 하나의 은하수 같은 길을 열어줄 것만 같았다. 나 역시 훗날 이 노래를 들으며 그 무렵의 나날과 무채색의 내 눈을 떠올릴 것 같았다.

하늘이 파랗던 어느 여름날, 카페 밖 횡단보도로 쏟아지는 사람들을 보며 술도 거의 마시지 않고 공연장도 가본 적 없던 나는 하지메가 운영하는 재즈바를 그려보며 처음으로 바라는 곳을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책에 나온 재즈 음악들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내가 스타 크로스드 러버스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 멜로디를 들을 때마다 시마모토가 생각나기 때문이라는 것과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그 곡은 이제 예전만큼 내 마음에 감동적으로 다가오지 않게 된 것이다.


냇 킹 콜, 듀크 엘링턴 외에도 이 책에는 수많은 곡들이 흘러나온다. 두 사람이 술을 마실 때 흘러나온 찰리 파커의 엠브레서블 유(Embraceable You)는 지나간 추억을 회기 하는 듯 하지만 한편으론 변해버린 세상과 지나간 첫사랑을 의미하기도 한다. 과거 마약 중독자와 성격 파탄자들로 가득했던 재즈 뮤지션들. 찰리 파커 역시 평생을 마약에 찌들어 살았다. 이 음악이 흘러나올 때 하지메는 시마모토에게 말한다. 

"요즘 재즈 뮤지션들은 다들 예의가 바르지. 내가 학생 시절에는 이렇지 않았거든."

"경영하는 입장에서는 예의 바르고 깔끔한 사람들이 훨씬 다루기 쉽거든. 온 세계가 찰리 파커로 가득 차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마약에 찌든 찰리 파커는 세월 속에 사라지고 예의 바른 뮤지션들이 비즈니스를 하기 좋은 세상이 된 것이며 그들의 첫사랑 역시 성인이 된 하지메에겐 간절하지 않은 것이다.  


찰리 파커 - Embraceable You


사람들은 이 책을 하루키의 자기 복제적 첫사랑 판타지라 쉽게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냉동되어버린 세월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하지메와 시마모토, 이 두 사람의 어린 시절 외로움과 결핍, 추억에 대한 그리움이 무겁게 뒤엉켜 있다. 시마모토는 하지메에게 사랑을 넘어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 혹은 잃어버린 물건처럼 추억을 가지고 찾아온다. 레스토랑의 예약석처럼 항상 자신의 맘을 비워놓고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두 사람. 냉동된 세월은 잠시 되살아나는 듯 하지만 모든 것들은 변하고 냉동됐던 세월은 태초에 공룡이 멸망하던 빙하기처럼 기억할 수도 없는 과거로 사라진다. 소설 속 하지메가 더 이상 스타 크로스드 러버스를 듣지 않게 된 것처럼 말이다. 



PS. 태양의 서쪽은 죽음을 의미하곤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새롭게 떠오를 태양을 위해 과거를 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과거에서 벗어난 하지메는 태양이 지표에 모습을 드러내고 한낮의 햇살 속에 파란 어둠이 삼켜지는 것을 바라본다. 시마모토가 떠나고 그는 온전히 자신의 삶을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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