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들은 집으로 돌아와 주었다
재수하는 아들은 눈을 부라렸고, 언쟁을 했고, 기분이 잔뜩 나쁜 상태로 집을 나섰다.
인사도 없이 가려는 아들을 현관까지 쫓아가 말을 붙였다.
그 짧은 말은,
집으로 돌아 올 표식으로 던져 둔 과자 부스러기나,
끊어지기 쉬워서 내내 불안해 하다가 결국은 예정된 듯이 끊어지고야 말 것 같은 작은 실 같은 거였다.
나는 아들의 새끼손가락 쯤에 집과, 혹은 부모와 연결된 가는 실을 묶는 심정으로 '아들, 다녀와~'라는 말을 반복했다.
아들은 원망어린 얼굴로 짧게 '응'하고 문을 닫았다.
그 말조차 고마웠다.
상대가 던진 말에 대꾸를 안 하고 돌아서는 것.
이쪽에서 건넨 말이 닿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나는 왜 평범한 풍경들이 불안한지 모르겠다.
일상의 모든 것이, 특히 사람과 사람의 말들이 유리로 만들어진 기분이다.
언제든 깨지고, 붙이지 못하고, 서로를 벨 것 같다.
병이다.
기분이 나빠도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오고,
마음이 지랄맞아도 부모들은 제 자실들에게 밥을 차려주기 마련인데,
그 회복력에 대한 믿음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아니, 아예 없었던 것 같은 생각도 든다.
하루종일 나는 불안했고,
아들이 학원에 잘 도착했는지,
화가 나서 무슨 짓이라도 벌일지,
집에 돌아와 줄 것인지를 걱정했다.
아들은 15시간 만에,
방금 다시 무뚝뚝하게 억지인사를 하며 돌아와 주었다.
내가 평상시처럼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넸다.
아들은 자기 방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바지가 요즘 불편해졌다'는 말도 조금은 가볍게 건네 주었다.
아들은 쉽게 회복하였고,
나는 하루 무게의 걱정을 내려 놓는 중이다.
감사한 일이다.
오늘, 결국은 나를 들여다 보는 것, 그것만이 나의 유일한 글감이라는 생각을 했다.
누구도 기록하지 않을 오늘 같은 날의 언쟁, 분노, 절망, 후회, 걱정 같은 것들이
어떻게 나를 움직이고 있는지,
어떻게 나의 마음을 다시 그리는지,
나는 그 작은 것들에 어떻게 반응하고 의미를 두고 있는지가
나의 유일한 세상이자 글감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서 적는 이 시간.
나는 나의 불안증을 잠시 들여다 보지만
엑스레이처럼 다만 들여다 볼 뿐이지
치료가 필요한지, 다만 들여다 보는 것이 필요한지, 어떻게 나아질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여지껏 그랬으니 앞으로도 이런 걱정은 반복될 텐데
중요한 게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나의 걱정 여부와 별개로 자식이 부모에게 돌아와 주는 것.
오직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병처럼 걱정하는 성격 때문에 하루가 편치 않았는데
이렇게 또 자판을 두드리는 노고로 밤도 과히 편하지는 않은 밤.
그러나 감사함 또한 묵직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