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럼을 사랑한 역사는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빅뱅의 <거짓말>을 다운받으려다가 실수로 뷰렛의 <거짓말>을 다운받은 것이 시작이었다(두 곡은 같은 해에 발매되었다. 무려 2007년의 일이다). 엄마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준 빨간색 아이리버 MP3에 담겨 있던 이 곡이 내 결혼식의 풍경을 바꿀 줄 그때는 몰랐다. 학교와 집을 반복하느라 별 낙이 없던 고3 수험생에게 중간중간 들리는 상쾌한 스네어 드럼 소리는 커다란 일탈처럼 느껴졌다.
무사히 수능을 마치고, 시험이 끝난 다음 날 아빠 몰래 14,000원짜리 드럼 스틱을 사서 동네 실용 음악 학원을 찾아갔다.
“드럼이 배우고 싶은데요.”
“아 입시 준비해요?”
“아뇨, 취미로요. 대학 가서 밴드 하려고요.”
문을 연 지 얼마 안 된 음악 학원에는 기타를 전공한 원장님과 드럼 선생님 한 분이 계셨다. 시골 동네 학원이라 학원생은 나까지 다섯 명. 레슨 시간도 따로 없었다. 마지막 겨울 방학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학원에서 먹고 놀면서 드럼을 쳤다.
처음 드럼 세트에 앉았던 순간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어느 방향을 보고 앉아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아 스틱을 쥐고 힘껏 스네어 드럼을 내리쳤다. 탄력 있는 타면 위로 명료한 소리가 울렸다. 페달을 밟고, 눈앞에 보이는 탐과 심벌을 차례로 두드렸다. 조금씩 다 다른 소리가 났다. 노래로 듣던 박자다운 박자를 칠 때까지는 며칠이 더 걸렸다. 오른손은 하이햇에, 왼손은 스네어 드럼에, 오른발은 베이스 드럼 앞 페달에, 왼발은 하이햇 스탠드 아래 페달에 두고 사지를 따로 움직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사실 엉망진창이었다).
기본 8비트가 익숙해질 때쯤 조금씩 비트를 변형하는 법을 배웠고, 칠 수 있는 비트가 여섯 개쯤 되었을 때 악보 보는 법을 알려주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드럼에도 악보가 있다. 드럼을 배우기 전에는 몰랐던 사실이다. 그냥 신나게 두드리면 되는 줄 알았지, 악보를 그려가며 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칠 수 있는 몇 안 되는 리듬을 오선지에 그리고 연습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어느 날부터는 기타 선생님이 부스에 들어와 옆에서 내가 치는 리듬에 맞게 기타를 쳐주었다. 그걸 ‘잼세션jam session’이라고 한다고 했다. 혼자 칠 때는 그냥 박자였던 것이, 기타 리프와 만나면 음표를 달고 음악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어떤 곡이 아니라 합주로 드럼을 배웠다. 잘 치는 것보다 같이 치는 것이 재미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아무래도 선생님을 잘 만났다. 드럼을 제대로 배우려면 타이어(연습 패드)부터 쳐야 한다. 타격감과 박자 감각을 익히기 위해서다. 만약 기본기를 탄탄하게 해야 한다고 한 달 동안 타이어를 치라고 했으면, 나는 드럼의 세계에 발을 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학원생 중 입시를 준비하는 중학생은 드럼 세트 구경도 못 하고 정석대로 한 달째 타이어를 치는 중이라고 했고, 라디오헤드의 <Creep>을 치고 싶다고 찾아온 친구는 각종 버전의 <Creep>을 마스터하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그냥 쳐보라고 했다. 기본기보다 즐거움을 알려주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 끈기 없음을 진즉 눈치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악보도 그렇다. 기본 비트도 겨우 치는 내게 웬 악보인가 싶었는데, 밴드를 하면서 의문이 풀렸다. 악보는 약속이다. 밴드 멤버들과 같은 곡을 치려면 악보를 공유해야 한다. 어느 타이밍에 무엇을 칠지 혼자만 알고 있어서는 합주가 되지 않는다. 짧은 시간 동안 ‘드럼의 정석’이 아니라 ‘밴드에 필요한 드럼’을 가르쳐줬기 때문에, 엉망이어도 즐거운 마음으로 밴드에서 계속해서 드럼을 칠 수 있는 게 아닐까.
몇 달 후, 신입생이 된 나는 소원대로 대학 밴드의 일원이 되었다. 첫 합주곡은 거짓말처럼 뷰렛의 <거짓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