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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Nov 16. 2022

웨딩드레스 휘날리며

드럼 치는 신부

결혼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정확히는 결혼식에 대한 로망. 계절은 무조건 봄이어야 한다. 꽃이 진 자리마다 연둣빛 새순이 흐드러진 봄날에, 탁 트인 야외에서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드럼 치는 신부가 되고 싶었다. 새로운 남자친구를 만날 때마다 그가 나와 결혼을 생각하든 말든 일방적으로 내 로망을 디테일하게 읊은 뒤, 그런 결혼식이 아니라면 차라리 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곤 했다. 스물아홉이 되던 해의 5월, 정말로 나는 새하얀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고 야외 예식장과 어울리지 않는 짙은 초록색 드럼 세트 위에 앉아 있었다. 가족과 일가친척, 나와 남편의 지인, 부모님과 시부모님의 지인 앞에서 오래된 취미를 공개하는 순간이었다.


취미가 드럼이라고 하면, 열에 아홉은 “드럼이요?” 하고 되묻는다. 의아하고 호기심 어린 시선과 함께. 그중 서넛은 마구 두드리는 제스처를 취하며 한 번 더 묻기도 한다. “이 드럼이요?” 수영이라고 했을 땐 내 드넓은 어깨를 흘끗 보고 과하게 끄덕였으면서, 영 믿기지 않는 눈치다. 또 그중 한둘은 주로 어떤 음악을 하냐, 제일 좋아하는 밴드가 누구냐, <슈퍼밴드>에 나왔던 여자처럼 치는 거냐, 영화 <위플래쉬> 재미있게 봤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면서 관심을 표현한다. 어색한 정적 또는 무조건 멋지다고 추켜세우는 민망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나는 웬만해선 드럼에 대해 말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 드럼을 결혼식이라는 일생일대의 공개 석상에서 오픈하기로 한 것이다.


큰돈을 쓸 때, 한 번뿐인 선택을 해야 할 때, 자기가 진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결혼 준비는 지금까지의 소비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사치스럽고, 하나부터 열까지 내 손으로 결정하는 선택의 장이었다. 내 생의 가장 큰 파티에 가장 사랑하는 드럼이 빠지면 안 될 것 같았다.   


예비 신부의 최대 고민인 ‘청첩장을 어디까지 돌릴 것인가’에 대해서도 드럼을 기준으로 두고 생각했다. 드럼 치는 모습을 보고 “웬 드럼?”이 아니라 “응 드럼(혹은 오 드럼)”하고 반응할 수 있는 사람까지만 초대하기로 했다. 내가 드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드럼 세트 위에 앉아 스틱을 네 번 탁탁탁탁 부딪혀 카운트할 때, 다른 악기와 합이 딱 맞아 들어갈 때 털이 쭈뼛 서면서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정성껏 만든 청첩장을 돌렸다.

 

결혼식 축가로 5분짜리 공연을 하기 위해 먼저 밴드 친구들을 소집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로는 늘 만나서 먹고 놀기 바빠 우리가 밴드에서 만났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모여서 곡을 정하고, 연습 시간을 맞추는 생산적인 대화를 아주 오랜만에 했다. 평소 우리의 대화는 주로 이번 주 토요일 저녁에 만날까, 일요일 낮에 만날까 아니면 메뉴를 세 개 시킬까, 네 개 시킬까, 이거 먹고 어디 갈까가 대부분이었다. 서로의 취향을 주장하며 자기 파트가 더 돋보이는 곡을 내밀고, 반대하고, 또 반대하고, 보컬에 맞추자고 했다가 기타에 맞추자고 했다가 결국 주인공이 원하는 노래를 하자고 세 발짝씩 양보해주었다.


아무튼, 그렇게 내게 결혼 준비는 ‘스드메’가 아니라 ‘축가’가 우선순위를 차지했다. 스튜디오 촬영이나 각종 관리에 쓸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아껴 공연을 준비했다. 시간을 쪼개 합주하고, 악기를 대여하고, 친구들이 맞춰 입을 옷을 함께 고르고, 예식 진행 담당자보다 음향팀과 더 많이 통화했다. 내 결혼식 축가를 준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어떤 공연을 준비하는 기분이었다. 여느 때처럼 즐겁고 분주하고 신이 났다. 공연이 시작되자 역시나 보컬은 말을 더듬었고, 박자는 달리기를 하고, 우리는 수시로 어긋났지만, 상관없었다.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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