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가 생겼다. 둘째라니, 내가 애 둘 맘이라니!
‘둘째’를 검색하니 ‘우아한 육아는 끝났다’ 같은 류의 글이 눈에 들어온다. 애초에 내 육아는 우아한 적이 없었는데, 큰일이다.
아무튼 예상치 못한 둘째의 등장으로 우리의 일 년 계획은 대폭 수정되었다. 올해, 모처럼 큰 결심을 한 참이었다. 건물주로부터 ‘또’ 월세 인상 통보를 받았고, 남편의 20대와 30대를 쏟아부은 가게를 정리하기로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이 어릴 때 국내 여기저기를 떠돌며 지내보자고, 그동안 여행하며 좋았던 곳, 살아보고 싶었던 곳에 길게 머물며 오빤 영상을 찍고 나는 글을 쓰자고, 이왕이면 그걸 엮어 책을 내고 가능하면 유퀴즈에도 출연하자고! 내가 출퇴근 없이 일할 수 있는 상황이니 얼마나 좋냐고, 귀여운 내 월급으로 우리 셋이 적게 쓰며 귀엽게 살아보자고 탕탕 결심을 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2023년이 너무 특별하게 느껴졌다. 우리 인생에 큰 변곡점이 될 거야, 까짓 껏 우리도 우리 삶을 한번 실험해 보는 거지, 아님 말고, 망해서 돌아온대도 우리는 여전히 젊으니까!
양가 부모님께 우리는 그렇게 살겠노라 선언하고, 친구와 지인들에게 한껏 응원도 받고, 살고 있는 집은 언제 처분하면 좋을지, 각 지역에서 한 달 살기 지원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을지 나름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보던 참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이 타이밍에 둘째라니, 둘째라니!
당장 6개월이나 연장한 필라테스와 새로 등록한 피부과도 어찌해야 하나 막막했다. 올여름엔 비키니 좀 입어보려고 닭가슴살을 저렇게 잔뜩 쟁였는데! 임신을 확인하자마자 급격하게 곤두박질친 컨디션과 입덧은 덤이었다. 잊을 게 따로 있지, 이 괴로움을 잊고 있었다니!
그래서 그냥 3월은 마구 게을러버렸다. 운동도 일도 글도 육아도 다 손 놓고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안 먹던 아이스크림과 사이다도 막 먹고 여름이한테 영상도 막 틀어주고 아무튼 막 지냈다.
브런치로부터 수시로 이런 메시지를 받으면서도 한 글자도 쓸 수가 없었다. 그저 누워서 밀린 드라마를 보고 또 보고 지겨워서 눈이 감길 때까지 봤던 거 또 보며 보낸 한 달.
애쓰며 사수하려고 노력했던 모든 것(작고 소중한 내 근육, 올해는 뭔가 터트려보겠다 다짐한 일에 대한 열정, 새로운 커리어, 글쓰기 습관, 여름이와의 추억 쌓기 등등등)을 놓고 보니, 공식적으로 게으른 이 시간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솔직히 생각보다 너무 좋...은데...?
그래, 인생이 내 맘대로 될 리 없지. 계획대로 될 리는 더더욱 없고. 실컷 누워 뒹굴며 오히려 좋은 것들을 떠올려 본다.
- 3살 터울 나쁘지 않다. 가까스로 노산도 면했다.
- 어차피 우리는 내가 버는 돈으로 셋이 여행하며 살기로 했으니, 가게 그만둔 김에 당분간 남편이 전업주부로 신생아 케어를 도맡을 수 있다.
- 나도 출퇴근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어른 둘에 아이 둘이면 할 만하다.
- 이제 막 시작한 강의를 계속 참여할 수 있다.
- 여름이 어린이집도 계속 다닐 수 있다. 그럼 낮엔 어른 둘에 아이 하나다. 오예.
그제야 철없는 애 둘 맘은 배 속에 꼬물꼬물 누워서 자기 속도 대로 크고 있는 새로운 아기가 기특하고 새삼스럽게 여겨진다. 잘 왔어, 재밌게 지내보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