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는 그냥 신나서 깨춤을 춰대는 꽃씨처럼 살고, 여름에는 방학하는 날 우리 필구처럼 살고, 가을에는 막 팔자 좋은 한량처럼 그냥 가을이나 타버리지 뭐. 겨울에는 눈밭에 개처럼 살아버릴 거야. 너무 태평하고 유쾌하지 않아, 엄마?
마음이 성성할 때마다 <동백꽃 필 무렵>을 본다. 최근에 여섯 번째 정주행을 시작했다. 한 줄 한 줄 마음에 닿지 않는 대사가 없지만, 특히나 겨울에는 눈밭에 개처럼 살아버릴 거라는 말이 콕 와 박혔다.
연애를 막 시작했을 때, 남편은 무엇을 해도 감흥이 없는 내게 솔깃한 제안을 했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어디로든 떠나자고. 약속대로 우린 봄엔 온갖 꽃을 찾아 떠나고, 여름엔 바다를, 가을엔 산책길을 향했다. 춥고 깜깜한 겨울이 늘 싫었는데, 얼음 바닥에 배를 깔고 송어를 잡거나 눈 쌓인 자작나무 숲에 벌러덩 누워 하늘을 보다가 난생처음 겨울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3년의 연애 끝에 결혼을 발표했을 때, 친구들은 도대체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결혼 제일 늦게 한다며!). 나는 이렇게 답했던 것 같다.
"같이 있으면 봄이 봄답고, 여름이 여름답고, 가을이 가을답고, 겨울이 겨울답더라고."
결혼을 한 후로는 양가 어른들과 매달 모이느라 둘만의 계절을 잊고 지내다가, 올해부터 아이와 셋이 홀수 달마다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첫 여행이 또 겨울이다.
둘이서 훌훌 떠날 때와 달리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은, 특히나 두 돌도 안 된 아이와 함께하는 '겨울 여행'은 고려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이동 거리가 많이 멀지 않아야 하고, 아기 의자, 식기, 침구류 등 기본적인 아기 용품이 갖춰져 있어야 하고, 아기와 함께 식사할 만한 곳이 근처에 있어야 하고, 추우니까 실내 놀거리도 충분해야 하고, 이왕이면 겨울 느낌을 만끽할 수 있어야 함).
이리저리 알아보다가 고른 곳은 강원도 평창. 여행은 여행과 원정 육아의 중간 즈음에서 그럭저럭 즐거웠다. 유아용 온수풀과 키즈카페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호텔, 아이 식기는 물론 아이들이 먹을 만한 메뉴까지 세심히 준비되어 있는 식사, 동물들을 만날 수 있는 작은 농장과 썰매장까지 완벽했는데 어쩐지 뭔가 모자라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마지막 날 눈이 내렸다. 아주 펑펑. 눈 예보가 있었던가. 아기 침대, 아기 밥 같은 걸 신경 쓰느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는데, 밤사이 온 세상이 하얗게 덮였다. 조식을 든든히 먹고, 아이를 꽁꽁 싸매고 나가서 냅다 눈밭에 던졌다. 그리고 나도 벌러덩. 눈밭에서 뒹군 게 얼마만이더라. 눈밭에 개처럼 겅중겅중 뛰다가 옆을 보니 아들이 눈밭에 강아지처럼 쫄랑쫄랑 걷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 본 풍경에 신난 아이는 총총 뛰어다니고, 나는 그런 애기를 쫄쫄 쫓아다니고, 남편은 우릴 찍겠다고 땀을 뻘뻘 흘렸다. 온몸의 눈을 툭툭 털면서 우리는 ‘아, 겨울이구나’ 했다. ‘아, 행복하다’고도 했다. 앞으로 우리는 이렇게 살면 되겠다, 까먹지 말고. 겨울을 겨울답게! 그렇게 셋이서 손을 모았다.
어떻게 살면 좋을지 막막할 때, 잘 살고 있는 걸까 의심될 때 그날의 풍경을 떠올린다. 그렇게 살면 되는 거지 뭐, 별 거 있나.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