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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Oct 01. 2024

과오를 범해도 살아남을 수 있는 법

크레온은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을까


복직 이후 첫 기안 문서. 수습에 수습을 더하는 중이다. 길지도 않은 기간이었지만 회사일은 아예 생각지도 않고 지내서였을까. 떡하니 있는 오류값도 체크하질 못하고 문서를 올려버렸다. 설상가상 또다시 코로나에 걸리는 바람에 병가 중에 수습을 했다. 급하게 자료의 수치를 일일이 바꿔 넣으면서도 미처 반영하지 못한 부분을 뒤늦게 발견했다. 아... 나는 왜 이 모양일까. 그냥 사라지고 싶다.


나름대로 복직 후 첫 기안이니 자료도 미리 작성해 놓고, 환산값으로 바꾸는 식까지 적용해서 완벽하게 산출해 두었다. 중요한 부분을 기껏 잘 작성해 놓고서는 어이없게 다른 곳에서 실수를 한 것이다. 경과를 보고하고, 계획안 문서를 재작성하고, 관계자들에게 다시 메일을 보냈다. 수정자료를 검토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그저 죄송할 따름이었다. 이럴 때 또 왜 아파가지고는. 덮어두고 잠이나 자고 싶은데 마음이 편치가 않다. 가뜩이나 아픈 머리가 지끈지끈거린다.




딸아이가 피아노학원에 다녀와서는 풀이 죽은 얼굴로 인사를 한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으니 엄마 품에서 서러움을 터뜨렸다. 한참을 엉엉 울고 난 후에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사정은 다음과 같다.


1) 선생님이 맞춰놓은 타이머가 울릴 때까지 연습곡을 쳐야 하는데, 딸아이가 그전에 마쳐 선생님께 혼남


2) 단짝친구는 잘했다고 칭찬을 받았는데, 그걸 선생님께 혼난 딸아이에게 자랑하니 속상한 마음이 더해짐


우선 큰일이 아니라서 속으로 안심했다. 1번에 대해서는 일부러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 확인해 보았다. 딸아이는 모르고 그랬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딸에게 나의 처참한 실수담을 공유하기로 했다.


"사실은 엄마도 오늘 실수를 했어. 그러고 나서 엄마가 제일 먼저 한 말이 뭔 줄 알아?"


"뭔데?"


"죄송하다는 말이었어. 그러고 나서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엄마의 상사분께 그대로 보고했지. 너에게 선생님이 있다면 엄마에겐 상사가 있거든. 그러고 나서 엄마는 잘못된 일을 바로잡았어. 그 과정에서 마음은 괴로웠지만 엄마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까 했지.


마찬가지로 너도 선생님께 타이머가 울릴 때까지 연습곡을 치는 걸 깜박했다고 말씀드리면 되고, '남은 시간까지 더 칠게요' 하고 마저 치고 나오면 되는 거야."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딸이 실토를 한다. 사실 연습곡이 너무 쉬운 부분이라서 그랬다는 것이다. 이미 내 손을 거친 문서 다시 보기 싫듯이 딸도 연습곡을 이만큼 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피아노 선생님이 그걸 몰랐을까. 아이가 단순히 깜박한 것이라면 혼낼 분이 아니다. 아이의 태도가 바르지 않은 것을 보았기에 그 부분을 혼내셨을 것이다.


딸이 이렇게 실상을 실토한 이상 나도 선생님과 같은 마음으로 나무라고 싶었으나, 참아야 했다. 나를 믿고 속마음을 말해준 것일 테니. 그러면서 나는 나의 상사를 생각했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혔으니 앞으로는 한 번 더 검토하라고 지시할 수 있다. 아니면 본인이 한 번 더 주의 깊게 보거나. 그 과정에서 나에 대한 신뢰는 접어두겠지. 회복하기까진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 과정도 내가 감당해야 할 것이다.


《내가 듣고 싶던 말, 네게 하고 싶은 말》


"딸아. 네가 생각할 때충분해도 선생님이 보기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엄마가 문서를 충분히 검토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수했듯이 말이야. 연습곡을 잘 치거나 일에서 실수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태도가 가장 중요하단다. 내가 기준이 되었을 때는 충분해 보여도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봤을 때는 아닐 수도 있다는 것, 내가 충분하지 않거나 틀릴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을 인정하는 태도 말이야. 그것이 바로 겸손이란다. 겸손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어. 겸손한 태도를 갖춰야만 다른 것으로부터 배울 수 있어. 다만 스스로 낮춤으로써 자존감까지 낮출 필요는 없단다. 그렇게 느껴지기 쉽겠지만 너는 그 과정에서 분명 더 나아지고, 나아가고 있을 거야. 반대로 교만하고 고집 피우는 사람은 자기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법이거든."


마침 요즘 들고 있던 고전책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마저 읽다 보니 크레온의 행동에 눈길이 간다. 안티고네를 비롯한 수많은 시민과 예언자, 아들 하에몬까지도 그의 결정에 대해 호소하지만 그는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다. 뒤늦게 바로잡아보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가 없애려 한 것은 자기 기준에 어긋났던 안티고네 한 명뿐이었으나, 민심은 물론 아들과 부인까지 모두 잃어버렸다. 그는 자신이 세운 기준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려다가 결국 그것이 올무가 된 것이다. 그는 결국 홀로 살았지만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을까. 모두가 그를 떠나고 나서야, 홀로 남겨지고 나서야 그는 고백한다.


"나는 죽기를 기도할 뿐이오. 그것 외에 내가 바라는 것은 없소. 날 여기서 데리고 나가주시오. 눈이 멀어 아들을 죽이고 아내를 죽인 어리석고 허영심에 찬 이 사람을. 오, 내가 어디를 둘러본들 살아갈 힘을 되찾을 수 있겠소?"




어쩌면 나는 능력치의 기본값이 워낙 낮아서 겸손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한 편으로는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뭐든지 금방 적응하고, 곧잘 해내고, 유능했다면 나 같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권력에 익숙한 크레온에게는 안티고네의 주장이 그저 권력에 도전하는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았겠지만, 자신을 제외한 수많은 시민들은 이미 마음속으로 그녀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들 안에는 왕이 지켜야 했던 권력만큼이나 소중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일까. 오늘 있었던 일을 통해 한 단어로 압축해 보자면 '신뢰'일 것이다. 크든 작든 내게 일을 맡겨준 사람에 대한 신의를 지키는 일. 나를 믿어주는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일. 다만 나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나를 믿어줘야 할 것이다. 설사 이런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 있더라도.


《그리고 내게 하고 싶은 말...》


"너는 잘 수습할 수 있을 거야, 변명하지 않을 거야. 정직하게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거야. 그 과정에서 보고하고 사과하고 주변으로부터 평가받고 책망받으며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너는 결코 우습지 않아. 너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돌이키려는 의지가 있는 한, 너는 절대 고립되지 않을 거야. 시민들은 크레온이 두려워서 말을 못 했지만 안티고네를 속으로 응원하고 있었듯이, 네가 깨지고 넘어지고 나아가는 과정을 응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기억해. 그러니 힘을 내.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어 보여도, 네 앞에 놓인 기회가 그만큼 많다는 것이니까. 다시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 다시 믿어주는 존재가 있음에 감사하며 오늘 나의 몫을 살아가보자."


그러니 조심하십시오, 왕이시여. 살아 있는 어떤 인간도 과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현명하고 신중한 자라면 악의 길에 빠졌을 때 자신의 길을 돌이켜 보고 과오를 바로잡을 줄도 알지요. 어리석은 자는 그렇게 돌아볼 줄 모르고 제 길만을 가는 완고한 자입니다.
-<안티고네>, 예언자 티레시아스의 대사 중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길로 행하여도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 가느니라(잠언 10:17)
훈계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잠언 15:32)


* 사진 출처: Pixabay, Esa Niemel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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