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이 Oct 31. 2024

무해한 글을 읽고 쓰는 일

작정하고 던지는 공 앞에서


개인적으로 상처받았다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받는 행위에도 나의 의지가 들어가는 것 같아서. 내가 안 받으면 그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독한 말과 행동이 나를 할퀴고 가면 생채기가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러니 상처를 냈다는 표현이 더 적확하지 않나 싶다. 주체를 내가 아닌 너로 명확히 해서, 내가 상처를 받았다가 아닌 네가 내게 상처를 냈다고.


피구를 할 때는 공을 받으면 상대방이 아웃이다. 나를 맞추려고 작정하고 던진 공을 피해야 하는 게임에서, 기를 쓰고 피하다가 조금이라도 맞으면 아웃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차라리 날아오는 공을 받아버리고 상대방을 아웃시키는 수도 있다. 상처를 받아도 이렇게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에게 상처 준 너, 아웃. 이라고 당당하게 외치면서.


그러나 상처는 대부분 무방비 상태에서 생긴다. 누구에게나 웃는 얼굴로 잘 지내는 사람이라서 마음의 빗장을 풀고 다가갔을 때 내게만 냉대하는 표정을 보았다거나, 뭐 그랬다거나 하는. 그렇다. 나는 그런 사람에게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 아니, 그런 사람이 내 마음에 생채기를 낸 적이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사람 이름에는 미소라는 뜻이 있었다. 내게만 미소 지어주지 않았던. 그러니까 그녀의 이름은 미소가 아니다, 내게는.


팔짱 끼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던 그 아이에게 내가 팔짱을 꼈을 때, 매정하게 뿌리쳤던 순간을 기억한다. 이후 미간을 찌푸린 채 내 팔이 닿았던 부분을 툭툭 털어내는 시늉을 했던 것까지. 마치 더러운 먼지를 털듯이 털어내며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표정이 생생하다. 사람 무시하는 것도 이토록 신박하게 할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내가 더러운 존재가 된 느낌을 받았다. 그 기분은 너무나도 더러워마흔이 되어가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떻게 더럽냐면, 끈적한 흔적을 남길 만큼 더럽다. 그 끈적함 위에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 잘도 달라붙는다. 더럽지 않던 생각들도 그것에 달라붙으면 더러워진다. 청소기나 빗자루로 쓱 하고 쓸어 담듯 쉽게 치울 수 없는 더러운 흔적이 남았다. 나의 자존감을 건드는 기억이 되었다.  


내가 그녀에게 특별히 잘못한 건 없었다. 그저 그 시기에 그녀와 친했던 아이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을 뿐. 친구가 무시했던 아이니 자기도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후 시간이 꽤 지나고 같은 대학 캠퍼스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녀는 내게 그 특유의 미소로 반갑게 인사를 했다. 기분이 묘했다. 내가 그토록 바랐던, 그러나 내게는 않았 그녀의 미소가 수년만에 나를 향했건만 나는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뿌리쳤던 것처럼 무시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녀의 미소를 볼 때마다 생경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떤 유형의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공통적으로는 높은 확률로 그 유형의 사람들로 인해 마음의 생채기를 입거나 고생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이유로 온도차가 심하거나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바라본 사람이 다른 사람이 바라본 그 사람과 동일한가를 검증한다. 그 특성이 한결같은 사람이라면, 아무리 치명적인 단점을 갖고 있을지라도 위험하지는 않다고 판단한다. 차라리 하나의 캐릭터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대비할 수 있단 얘기다. 이것이 예측되지 않는 사람이라면 가까이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 또한 내 기준일 뿐이다. 내 마음이 편협하고 어떤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라면, 우리가 바라보는 인물은 같지 않을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보는 만큼 내가 그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 사람 보는 눈을 키우는 것도 사람을 경험해봐야만 할 수 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만 곁에 둘 수 있을 뿐이다. 적어도 무방비 상태에 있어도 내게 생채기를 내지 않을 안전한 사람들. 무해한 사람들. 그런데 곁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다. 무해한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는 것인지, 곁을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의 품이 점점 작아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차라리 후자인 편이 다행일 것이다.


글에도 기운이 있다. 무해한 글이 있고 나아가서 감정과 영혼을 정화시키는 글이 있다. 반면 유해한 글도 있다. 한 때 독서라는 행위에 회의감을 가졌던 것도 이 때문이다. 나름 출판이라는 '검증된' 과정을 거친 책들 중에서도 무가치하다고 생각되는 책들이 있었다. 나아가서 편중된 사상을 주입하고 영혼을 좀먹게 하는 유해한 책들도 있었다. 아무리 문체가 유려한들 유익하지 않은 글은 내게 가치가 없다.


이것은 단순히 밝고 어두운 글로 구분되지 않는다. 슬프고 우울한 소재를 이야기하더라도 진실되고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따뜻하지 않더라도 소망하는 바를 느낄 수 있다. 헤매고 방황하더라도 빛을 향해 나아가려는 몸부림이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어두운 글이 아니다. 반대로 유쾌한 소재를 이야기하더라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채 껍데기에 불과한 감정들만 나열해 놓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나는 글을 읽을 때 당장에 드리워진 그늘보다도, 다루고 있는 주제의 명암보다도 글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결국 글쓴이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느냐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곳 브런치에서 만나는 글은 다양하다. 주제도 다양하고, 글에 녹아있는 삶의 경험도 다양하다. 그가 쓰는 글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이미 그가 남긴 댓글로 파악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의도적으로 용기와 격려를 댓글로 적어낸 이 사람은 적어도 의도적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사람은 아니겠다는, 무해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브런치에서 누군가를 공연히 비방하고 까내리는 글은 아직까지 읽어보질 못했다. 의식적으로 그런 글들을 읽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앞으로도 나는 무해한 것들로 내 삶을 채워나갈 것이다. 나부터 실수할 수 있고, 의도치 않게 타인에게 피해를 입힐 수도 있겠지만,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나아지기 위해 글을 쓰는 과정에서 해로운 것들은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오래전 상처받은 감정들까지도. 아니 누군가가 작정하고 상처 낸 마음들까지도 말이다. 그조차도 소재로 삼아 글로 써낼 수 있다면, 이것은 더 이상 내게 마음에 맺힌 응어리가 아닌 작정하고 받아낸 공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당당하게 외칠 수 있다.


이제 내 마음에서 나가. 아웃. 이라고.



* 사진 출처: Pixaba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