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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Nov 08. 2024

나의 축의금을 돌려주세요


아빠는 엄마를 믿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다시 한번 말하기를, 나는 너무 믿었다고 생각하지만) 중요한 일을 두고 엄마와 상의하지 않았다. 그 중요한 일이란 대부분 돈이 들어가는 일이었으며, 그렇기에 엄마에겐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이번달을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와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생활이란 옛 시절 교과서였던 바른생활이나 슬기로운 생활 책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철없는 우리의 요구를 거절 혹은 마지못해 승인하거나, 아쉬운 소리를 하며 무엇을 얻어오거나 하여 버텨내야 하문제였다.


예상치 못한 지출에 엄마의 불안도는 더욱 높아졌고, 부부간 상의 없이 결정을 내리는 아빠에 대한 신뢰도는 낮아졌다. 엄마가 느끼는 무력감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마늘을 까다가, 나물을 다듬다가도 상념에 젖고 길게 한숨을 쉬던 엄마의 표정은 모든 조명이 꺼져버린 깜깜한 무대 같았다. 무대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 채 암흑 속을 헤맬 뿐이었다. 그는 많은 경우 엄마와 상의 없이 결정을 고, 그 결정은 그리 옳은 편도 아니었다. 뒤늦게 가슴을 치는 엄마 앞에서 그는 어김없이 변명하다 입을 닫을 뿐이었다. 자신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에 제대로 책임을 지지도 않는 아빠에 대한 신뢰도는 가장의 권위와 함께 추락해 버렸다.


그것에 대한 분노는, 나의 결혼식 이후 터져버렸다. 결혼식 이후 바로 신혼여행에 다녀왔던 나는 잠시 친정 집에 들렀다. 짐과 함께 잠시 맡겨놓은 축의금 명단과 축의금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친척들로부터 받은 돈이 아니었고 나의 친구와 지인들로부터 받은 돈이었다. 그러니까 가지고 있다가 결국 내가 돌려줘야 할 돈이었다. 그런데 아빠는 이번에도 어물쩍 넘어가려 했다. 어디에 잠시 맡겨두었다며 며칠 뒤 찾아서 송금해 준다고 했다. 역시나 느낌이 안 좋아서 더 캐물으니 결국 실토하기를, 그 돈으로 주식을 샀다고 했다. 며칠 뒤면 주가가 오르니까 불려서 돌려주겠노라고.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고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또래보다 이른 나이에 시집가는 딸이, 아직 취직도 못한 친구들과 지인들에게서 받은 축의금을, 그것의 반절조차도 맨몸으로 시집가는 딸에게 보태지 못했으면서, 나의 허락도 없이 주식에 넣어두었다는 사실이. 먼저 그 사실에 너무 화가 났고, 내가 지켜봐 왔던 정직하지 못한 태도가 결국 나에게도 미쳤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폭발해 버렸다. 차마 밥상을 뒤엎진 못했지만 숟가락을 내던져버렸다. 핏줄을 세워 있는 힘껏 소리치는 나의 모습에 아빠는 질려버린 듯했다.


나는 그 순간, 오래전 아빠가 자신에게 달려들듯 반항하는 언니를 바라보던 배신감 서린 눈빛을 보았다. 그것이 하극상에 대한 분노로 변하여 손찌검하기 바로 직전, 아빠는 그 순간을 참고 밖으로 나갔다. 한참 뒤 돌아와 방에 있던 나를 불러내서 문을 열었더니 아빠는 돈을 던졌다. 뭐라고 하셨는지 그 말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 장면이 너무 충격적이라서 잊어버렸다. 여전히 화는 나있었지만 내가 너무했나 싶어 마음 문을 열듯 조심스레 문을 열던 참이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흩뿌려진 나의 축의금. 그것은 돈이라는 형태에 담긴 나의 친구들과 지인들의 마음이었다. 지폐를 줍는 동안 눈물이 났다. 왜 내가 이 돈을 줍고 있어야 하지. 내 결혼식에 찾아와서 나를 축복하는 소중한 마음과 함께 봉투에 넣어주었을 이 돈을. 이 돈이 더 많은 금액으로 불려져서 내게 오길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오롯이 받아 들기 원했다. 그것은 시집을 가면서 내가 들고 갈 수 있는 가장 큰 목돈이었다.  돈으로 투자를 결정하더라도 나와 내 남편이 해야 할 몫이었다.


백 번 양보하여 내가 신혼여행을 간 사이에 축의금을 통장에 넣어두는 대신 주식을 사버렸더라도, 그날에는 내게 정직하게 말했어야 했다. 며칠 사이 오를 것 같으니 며칠만 더 넣어두는 게 어떨지 나의 의사를 물었어야 했다. 나의 의사와 반하는 행동을 할 권리는 그에게 없었다. 여차해서 주가가 떨어지는 경우 본전을 찾아줄 능력도 없었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남편을 남편으로 선택했고, 결혼하자고 해서 결혼을 결심한 것뿐인데,  과정에서 느꼈던 초라한 마음들이 흩어진 지폐들처럼 내 마음에 낭자했다. 대한민국에서 결혼은 집안과 집안이 만나는 순간이었고, 그 합의결과가 결코 동등하지 않았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미 작아 보이는 부모님이 더 작아지길 바란 건 아니었지만, 왜 이런 행동으로 입지를 자처해서 좁혀가는 것인지 나는 아프기만 했다. 결혼 과정에서 그를 아버지로서 존중하지 못해 한편에 남아있던 죄송한 마음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무엇이 되었든 아빠와 상의하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봐왔던 그의 무책임하고 정직하지 못한 모습에 틀림이 없었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는 믿을만한 대상은 아니었지만 믿어줄 순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조금도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 사진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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