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경제적 무능함 때문만은 아니다. 무능함으로 따지자면, 평생 돈돈 하면서도 스스로 벌어볼 생각 없이 받아쓰기에만 익숙했던 엄마가 더할 것이다. 나는 그의 무책임하고 정직하지 못한 태도가 싫었다. 가장이었던 그는 안정적인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형편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늘 버는 돈의 일부만을 엄마에게 떼어주었다. 엄마에게 떼어주는 돈은 우리 식구가 먹고살아야 하는 돈이었다. 그는 가장이니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금액을 보면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세상물정을 모르든, 그 돈으로 두 아이를 키워야 하는 엄마의 고충을 모르든 그는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모르는 척하거나.
엄마는 결코 과소비하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아빠는 엄마를 믿지 못했다. 엄마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나는 사실 아빠가 엄마를 너무 믿어서였다고 생각한다. 그 정도만 던져줘도 어떻게든 버티며 살아내는 엄마를. 그러나 그녀가 살아내는 방식은 점점 더 극단적으로 치달아서, 우리 집은 바퀴벌레가 득실거리는 쓰레기집이 되었다. 그녀는 열심히 어딘가에서 무엇을 받아왔다. 길에 버려진 것을 주워다가 살림을 했고, 남의 것을 얻어다가 우리를 입히고 먹였다. 체력도 약한 그녀가 교회 식당에서 오랫동안 봉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남은 음식을 받아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쓰레기 같던 그 집에서도 멀끔히 하고 다니던 아빠의 모습은 나의 엄마와 너무나도 대조되었다. 친구와 지인들을 만나러 갈 때마다, 엄마는 밥값은 누가 내는 거냐 물었고, 나는 아빠가 매번 얻어먹고 다닐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아빠는 이런 부분에서 염치와 눈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체면 차리는 일을 진작 포기했지만 일명 줄 서기, 낙하산 같은 구직활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아빠의 대외활동을 허용했다.
구직활동이라는 이유로 아빠가 지인들에게 밥을 사고 술을 사며 다니는 동안 엄마는 우리를 먹이고 입혔다. 몸이 부서지도록 교회에서 봉사를 하고 난 후 남은 음식을 싸 오며, 헌 옷코너를 뒤져가며. 그렇게 겨우 경비 일자리를 얻었을 때도 월급의 전부를 주는 법이 없었다. 점심 밥값을 고려해도 너무하다며, '이걸로 어떻게 살라는 거냐'던 엄마의 한숨 섞인 외침이 생생하다.
나중에야 명칭을 알게 된, 엄마의 저장강박증이라는 정신적 행동 장애로 인해 우리의 환경은 점점 더 황폐해졌다. 어렸던 우리는 이것이 병인지도 모른 채 그저 엄마의 살림방식을 탓했다. 아빠도 그런 병이 있는지는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엄마가 왜 물건들을 주워오는지를. 기를 쓰고 헌 물건들을 받아오는지를.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처럼 그것들이 언제 필요할지 몰라서 강박적으로 저장하는 엄마의 심정을. 불안정한 경제상황 속에서, 월급의 반절조차도 그녀에게 떼어주지 않는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알았어야만 했다. 몰랐다면 기만이다. 모른 척했던 거라고 생각한다.
현실적인 문제들을 놓고 엄마가 묻는 질문들 앞에서 그는 늘 횡설수설했다. 자기 딴에는 그럴듯한 변명이었겠지만, 미심쩍어서 캐묻거나 앞뒤가 안 맞아서 되물어볼 때면 말이 없어졌다. 더 묻지 말라는 듯 돌아선 그의 뒤통수에 대고 엄마는 몇 마디 더 하다가 속이 터져 죽겠다는 시늉을 했다. 이내 포기하곤 푸념을 중얼거리는 엄마의 표정으로 줌 아웃. 늘 반복되던 그 풍경은 김창옥 강사님의 표현처럼, 마치 블랙홀과도 같았다.
곤란한 질문들 앞에서 엄마는 처음부터 입을 닫았다면 그는 변명을 했다. 둘 다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며 언니는 성질을 버렸고, 나는 기대를 버렸다. 대신 기대를 받는 존재가 되었으나 결과적으로 가정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진 않았다. 그저 내 살길을 찾아갔을 뿐.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해야 했을 것은 효도였을까. 아니면 가장의 역할이었을까. 어느 것이든 나는 잘 해내지 못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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