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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Nov 18. 2024

빨간약이 아니라 빨간통


내 기억 속 나의 아버지에게는 아주 약간의 교양과 낭만이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두꺼운 전화번호부가 집집마다 배부되었고, 아빠는 매년 그중 몇 개의 번호를 노트에 옮겨 적었다. 아빠의 글씨는 정갈하고 멋있었다. 마치 서예를 하듯 볼펜으로 적어 넣은 글씨들은 매우 근사해서, 그가 적었던 그의 이름 석 자의 글씨체가 아직도 기억난다.


그의 교양과 낭만이란 이런 것이었다. 글씨를 멋들게 쓰는 일, 종이에 직접 적은 시구를 지갑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일. 그것이 어떤 시였는지 지금에서야 문득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 지갑에는 언니가 처음으로 써드렸던 편지도 보관되어 있었다. 술김에 아빠가 용돈을 주며 지갑을 펼쳐 보여주었던 기억이 난다.




H건설을 다니고 있던 큰외삼촌의 도움으로 아빠는 몇 달간 건설 현장직에 투입되었다. 관리 반장이라고 해서 인부보다는 힘들지 않다고 했지만 천상 한량에 가깝던 아빠는 몸 쓰는 일이 고되었을 것이다. 큰외삼촌은 아빠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책임감이 강했다. 내가 더 어릴 적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홀로 남은 외할머니와 엄마를 포함한 일곱 명의 동생들을 잘 돌보겠노라 했고 실제로 우리에게 도움을 많이 주었다. 외삼촌도 어엿한 가정이 있었고 자녀들은 나와 비슷한 또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임감은 형제들에게까지 미친 것이다.


그에 비해 아빠가 책임져야 할 대상은 엄마와 두 딸, 겨우 세 명이었다. 결혼 후 십 년이 넘도록 변변한 직장이 없던 아빠를 바라보며 외삼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너무나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서 말조차 섞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주 가끔 친척 결혼식에서 모두가 만날 때면 외삼촌은 아빠에게 애써 눈길을 두지 않았고, 아빠도 시선을 떨구고 있었던 것 같다.




오로지 동생과 조카들을 위해 일자리를 마련해 준 아내의 오빠에게, 더 이상으로 밉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름 긴장하고 일했던 노동의 경험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빠는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임시로 얻어 준 공간에서 숙식을 했고, 몇 주에 한 번씩만 집에 왔다. 아빠는 나름대로 성실하게 일하고 있는 듯 보였고, 엄마는 그런 아빠를 내심 대견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이차이가 있는 언니는 미용고등학교로 진학하며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고, 집에는 나와 엄마 둘만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니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을 것이다. 어느 날 내 앞으로 소포가 왔다. 지금에서야 택배 물품을 자주 받아보지만, 당시 내 이름이 적힌 소포는 처음 받아보는 거라서 어리둥절하면서도 설렜다.


깨끗한 상자 위 받는 사람 란에는 정갈한 글씨체로 내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 글씨체는 아빠의 것이었다. 조심스레 풀어보니 그 안에는 빨간색 하트모양의 틴케이스 상자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유산지에 개별 포장초콜릿 고이 담겨 있었다.


그런 고급스러움은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금박지에 포장된 가짜 금화 초콜릿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부드러움과 달달함이 느껴졌다. 어느 것은 찐득한 캐러멜이 들어있었고, 어느 것은 견과류가 들어있기도 했다. 나는 그것이 너무도 소중하여 매일 한 개씩 꺼내 먹었다. 초콜릿을 다 먹은 뒤에도 틴케이스가 예뻐서 귀중품을 담아두었던 기억이 난다.


가수 자이언티가 택시 기사였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만든 노래인 <양화대교>, 그리고 그의 또 다른 노래인 <꺼내 먹어요>를 들으며 나의 아버지를 생각한다. 내가 결혼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는 아버지를 더욱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고,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선은 자이언티보다는 외삼촌에 가까웠다. 나의 동생을, 나의 엄마를 고생시키는 무능력한 남자에 대한 시선.


그 냉정한 시선 속에서도 그가 내게 아버지로서 베풀었던 그의 낭만은 속절없이 달콤했다. 빨간 통에 담겨있던 그것은 빨간 약처럼 나를 치유하는 능력은 없지만, 쓰라린 고통 속에서 호호하고 불어주는 것 같은 훈풍의 효과가 있다. 상처 입고 넘어져서 무력한 내가, 그 훈풍이 불어오는 순간만큼은 무방비한 상태로 앉아있을 뿐이다.


아아, 그 훈풍을 불어주는 이는 누구란 말인가. 내 마음에 상처를 냈으면서도 빨간통에 담긴 사랑으로 나를 위로하는. 달콤한 초콜릿은 이미 없어져버렸지만 나는 분명 그것을 먹은 적이 있다. 그것은 오직 나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가 내 몫으로 보내준 그의 사랑이었다.



* 사진 출처: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월드유로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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