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를 켜놓고 나를 썼다. 쓰는 동안 마음이 아팠다. 나 자신과 아빠의 못난 모습들이 한 데 뒤엉킨 채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그 모습들이 내게서, 아빠에게서 보일 때마다 발로 차고 또 찼다. 다른 사람들은 허공 속이나 이불속 발차기로 끝날 것들도 나는 그렇지 못했다. 반드시 마음속에서 어떤 존재를 차버려야만 직성이 풀렸다. 나라는 존재를. 그리고 아빠라는 존재를.
나 자신이 이상적 자아상을 만들어놓고 그것에 도달하지 못하는 나를 끊임없이 탓하면서, 내가 나에게 '이게 최선이야? 이것밖에 안 돼?' 그렇게 말했어요. 내가 나의 엄마가 되어 내가 나를 억압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런 것을 초자아라고 해요. 초아자가 점점 커져서 제 안의 괴물이 커버린 거죠. - 정여울, <끝까지 쓰는 용기>
이 책에서 작가가 말하길, 처음에는 부모님의 잔소리나 선생님의 훈육 때문에 초자아가 생기고, 나중에는 그것이 자기 검열 기관이 돼버린다고 했다.나의 경우도 그랬다. 대신 그것은 내게 어떤 노력을 수반하게 하는 채찍질이 아니었다. 내가 가진 특성에 대한 조소와 비난이었다.
아빠를 닮아 어릴 때부터 또래보다 키가 컸던 나는 키에 비해 몸무게가 많이 나가질 않았다. 엄마를 닮아서 하얗던 언니와 달리, 나는 피부까지도 아빠를 닮아서 까무잡잡한 데다 너무 마른 탓에 소말리아 어린이 같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키는 컸지만 다리에 힘이 없어서였는지 뛰다가 걷다가 픽픽 쓰러지곤 했다. 어릴 때 코피도 자주 나서 엄마가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나를 보고 걱정되어서 한 말이었을 것이다. 아빠는 내게 키만 멀대같이 크다, 애가 야무지지 못하다, 덤벙댄다 같은 말을 자주 했다. 내가 다쳐도, 냉장고에서 무엇을 꺼내다 쏟아도, 아무리 덤벙대도 엄마는 나를 탓한 적 없다. 깨진 무르팍에 연고를 발라주고 밴드를 붙여주는 사람. 놔둬, 내가 치울게. 하며 그런 나를 수습한 사람은 정작 엄마였다. 그런 나를 지켜보며 꼭 한 마디씩 하던 사람이 바로 아빠였다. 그러잖아도 부끄럽고 민망했던 나를 그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뚫어지게 바라보며 뜻 모를 헛웃음을 짓거나 참 희한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것이 나를 수치스럽게 했다.
어릴 적 나는 말이 없었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넣고 입을 앙다무는 게 습관이었다. 말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낯설고 친밀하지 않은 사람 앞에서는 좀체 입을 열지 않았다. 묻는 말에도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명절마다 방문하던 친척집에서는 내가 친척 동생들과 장난치던 모습을 보고 나의 말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는 어른도 계셨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 어른들은 특히 어려웠으며 아빠도 내게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내게 가르쳐주지도 않은 단어를 쓰며 나무랐다. 가세를 가져오라는 그의 말에 차마 그게 무엇인지 되묻지를 못했다. 서랍 속에 있다는 말에 힌트를 얻어 작은 손에 이것저것 담아 가져갔다.
"가세 가져오라고 가세!"
가세가 무엇인지 몰라서 우물쭈물하는 내게 그는 결국 직접 보여주었다. 아빠가 집어든 것은 가위였다. 우리 집에서 가장 크고 무거웠던 가위.엿을 자를 때나 쓰는 것처럼 생겼던 그 가위의 모양새와 무게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게 가세잖아! 가세도 몰라?"
알고 보니 그건 사투리였다. 가세가 가위를 뜻하는 말인지 그는 내게 알려준 적이 없었다. 엄마도 그런 단어를 쓰지 않았다. 혹시 아빠가 일전에 엄마에게 가세를 달라는 말을 했던가. 내가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며 '알아서' 알아들어야 했을까. 내가 눈치가 없었던 건가. 그가 너무도 당당했기에 나는 황당했다.
그는 단지 마음이 급했을 뿐이고, 청력이 좋지 않아서 목소리가 컸을 뿐이고, 그에 비해 나는 너무 소심하고 말소리가 작았을 뿐이고, 그는 그런 내가 순간 답답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입을 꾹 다물고 살던 어린 시절, 나는 외부의 말들을 삼키는 중이었다. 그런 나를 나무랐던 그의 말들이 마음에 가장 많이 쌓였다.
나이차이가 많이 나고 야무졌던 언니는 내가 어릴 땐 업고 다닐 정도로 예뻐해 주었지만, 조금 더 컸을 땐 아빠와 같이 답답함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저기 있는 것 좀 가져와봐, 이런 식의 주문에 나는 취약했다. 그렇다고 헤매는 내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주지도 않았다. 저기! 저기! 손가락으로 똑같은 곳을 가리키며 더 큰 소리로 외칠 뿐이었다.
"야, 너 그게 안 보이냐? 바보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모습. 한심하다는 말투. 그런 것들이 그 시절 내게 자주 쌓였다. 유일하게 엄마만이 나를 그렇게 대하지 않았다. 엄마는 저장강박증 때문에 너저분하게 늘어놓은 살림살이와 잡동사니들 사이에서도 내가 필요하다는 것들을 말없이 척척 찾아줄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은근히 뿌듯해했다. 이것 보라며, 이렇게 필요할 줄 알고 자기가 버리지 않고 놔둔 것이라며. 어쩌면 그 속에서 내가 무엇을 발견하기란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보통 사람보다 주의력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었다. 당시에는 내가 말귀도 못 알아듣고 눈치도 없는 바보인가 싶었다. 그저 주의력이 조금 떨어지는 것뿐이었는데 말이다. 더욱이 경직된 마음으로는 무엇도 볼 수 없고 할 수가 없는 사람이 있다. 그게 바로 나였다. 내가 어른이 되어서도, 아빠와 언니가 보이지 않을 때도 내 속의 초자아는 자주 나를 탓하고 무시했다. 어릴 적 내 귀에 울렸던 아빠의 목소리보다도 더 크고 파괴적인 목소리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는 나를 안아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