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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Nov 15. 2024

반갑지 않은 손님


내가 어릴 적 우리 집에 낯선 할머니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엄마는 그분을 불편해하는 기색이었다. 그분은 심지어 우리 집에서 주무시기도 했다. 먼 길 오느라 피곤하다는 이유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시위의 형태가 아니었나 싶다. 나중에서야 그분이 우리 집에 가끔 전화를 걸던 발신자이자, 엄마가 내게 '없다고 말해'라고 시킬 정도로 피하고 싶었던 대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반갑지 않던 손님은 아빠의 빚쟁이였다. 아빠는 엄마와 결혼하기 전 종종 노름을 했고, 아빠의 아버지였던 할아버지는 나중에 자기가 갚아줄 테니 엄마에게 빚을 얻어서 노름할 돈을 마련해 주라고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이 모든 이야기의 전말은 성인이 되고 나서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였고, 나는 비로소 내 기억 속에 있던 이상한 할머니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었다.


그는 이전에도 동네 아저씨와 시비가 붙어서 경찰서 신세를 지기도 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라 다행히 기억에는 없지만, 그가 전과범이 되지 않게 하려던 엄마의 고생담을 들었다. 나는 그가 그래도 이전보다 철이 들었다고 하는 엄마의 말을 받아들였다. 이전보다는. 그래, 이전보다는.




반면 나는 일찍이 어른스럽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또래에 비해 키가 크고 조숙했던 외모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를 왜 낳았냐, 해준 게 뭐가 있냐'며 대놓고 원망하던 언니에게 상처받은 부모님을 차마 함께 미워하기보다는 불쌍히 여기는 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소화 능력이 약한 어린아이가 덩어리 진 음식을 삼켜버린 것처럼 어딘가 얹혀있는 듯 불편해 보이는 기색을 어떤 선배와 어른들은 눈치채주었다. 고맙게도.


어른스러운 척하는 나를 부담스럽고 불편해하는 선배들도 있었다. 그 나이가 아니면, 경험하지 않으면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나는 애써 이해하려 했고 이해하는 척했다. 그것이 내가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해하는 방식이자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 기대와 설렘으로 눈을 반짝이며 세상에 도전장을 내미는 신입생의 치기는 없었다. 그저 두렵고 막막한 현실을 수용하는 척하며 순응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것이 또래의 눈에는 퍽이나 어른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사실 나는 속으로 끝없는 방황을 하는 중이었는데.


그 시절 교회에서 만난 40대 집사님은 그런 나를 알아봐 주었다. 그는 내가 어른인 척하는 걸 불편해하기보다는 안쓰러워했고, 방황하며 겪는 고통에 대해서 귀 기울여주었다. 어느새 이십 대였던 그때의 나보다도 그분의 나이에 가까워가는 지금, 나는 나의 자녀에 대해 생각해 본다. 바라건대 또래보다 지나치게 어른스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모를 헤아리는 기특한 마음을 넘어선 무거운 짐을 지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굳게 다짐해 본다.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나를 며느리라 부르며 살뜰히 살펴주셨던 그분. 가족에게조차 받지 못했던 풍족한 사랑을 경험이라는 티켓으로 베풀어주셨던 그분을 나는 아버지보다도 더욱 의지했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생판 남이었던 그 집사님보다도,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의 짐을 더 알아봐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 왔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내가 일찍 철이 들길 누구보다 바랐는지도 모른다. 일찍 철이 들어서, 어서 그들을 거둬주기를 바랐을지도.


반갑지 않은 손님이 불쑥 찾아왔던 날, 그분을 불편해하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던 그 시절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그들에게서 태어나 자라면서 빚을 졌다는 이유로 그들은 내게 빚쟁이가 되었다. 무작정 찾아온 빚쟁이를 마지못해 들여보낸 것처럼 나는 그들을 통째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내가 자식으로서 그들에게 진 것은 사랑의 빚이 분명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어른의 모습을 배우기도 전에, 그래서 어른이 되기도 전에 나를 무겁게 끌어내리던 것이 있었다.


나는 차마 그것을 끊고 달아나지 못했다. 내가 엄마에게 배운 것은 그저 현실에 순응하는 것. 믿을만하지 않은 가장을 넘어서지 못하고 그 좁은 울타리 안에서 순응하며 망가져버린 엄마를 보면서도 나는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쇠사슬에 묶인 코끼리처럼 덩치만 커버린 채 나는 그들을 짐처럼 여기고, 그들 또한 나를 짐처럼 여기고 있었다. 빨리 여상에 가서 취직이나 했으면 좋았을 걸 뭐 하러 대학을 가고 휴학까지 했느냐며 엄마는 결국 나를 나무랐다. 그리고 그 집사님은 뭐 하러 너를 미국까지 불러서 취직기간을 늦춘 거냐던 엄마의 속 좁은 말들이 나를 찔렀다.


아직 이십 대 초반이었지만 내 형편에서 휴학은 분명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나를 살펴주던 그분도 나의 도피성 휴학 결정에 쓴소리를 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시기에 내가 경험했으면 하는 것들이 있다며 그분의 가정으로, 미국으로 나를 초대해 주었다. 나는 그곳에서 많은 것들을 경험했으며 그중에서도 최고의 경험은 제대로 된 가정의 롤모델을 보았다는 것이다. 무비자로 머물 수 있는 최대기간인 삼 개월 동안 나는 그분의 집에 머물렀고, 예정에 없던 동부 여행을 하며 그분께 빌려 쓴 경비를 갚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내가 그분께 얼마나 큰 빚을 졌는지 부모님은 알아야 했다. 그것은 내 마음을 무겁게 하는 빚이 아니었다.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하는, 더 잘 살고 싶게 만드는 사랑의 빚이었다. 그분을 탓할 자격이 없음에도 나의 취직이 늦어진다는 이유만으로 엄마는 그분을 탓했다. 결국 나를 탓하는 말이었다.


아빠는 나를 탓하진 않았지만 엄마가 나를 탓하게 한 원인이기도 했다. 그나마 기대어 살던 남편은 늙어가고, 장성한 자식은 아직 기댈 만하지 못한 것이 그녀를 불안하고 조급하게 했을 거라고. 나는 또다시 아빠를 탓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탓하며 그 시기를 보냈다. 빚 독촉을 하는 빚쟁이처럼. 마치 서로에게 받아낼 것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결코 편하지 않은,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 사진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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