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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Nov 17. 2024

살아계신 아버지와 OOO 씨


집과 멀지 않은 대학에 입학할 때는 내 이름으로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내가 타 지역에서 자취하는 것도 아닌데 보호자로 동행했던 엄마는 생활비 대출까지 신청했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우리 가족의 생활비로 쓰였다. 기대하진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비싸지 않았던 국립대 입학금을 충당하지 못할 정도로, 입학금은커녕 생활비까지 대출받아야 할 정도로 어려운 형편이라는 것이 서글펐다. 그저 내가 조금 더 철이 들고 열심히 했더라면 장학금을 받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걸 탓했다. 홀로 설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걸음마를 하기도 전에 홀로 서야 하는 기분이었다. 분명 아빠와 엄마라는 보호자가 있는데도 감히 고아가 된 것 같은 기분을 자주 느꼈다.


그렇게 나의 이십 대는 정서적인 외로움과 본격적으로 맞닥뜨리는 시기였다. 유예하고 싶었으면서도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기이기도 하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인연을 맺은 시기이기도 했지만, 정작 나와 내 가족과는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다. 그렇다고 사이가 나쁘지도 않았다. 덮어두고 살았기에 지금처럼 미워하는 감정도 두드러지지 않았다. 대신 나 자신조차도 내 마음을 알 수 없어 지독한 방황을 겪었다. 지금에서야 글쓰기를 통해 덮어두었던 감정들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 시절 내가 자주 찾고 만났던 하나님은 믿을만한 존재였다. 전지전능한 신이니까. 무능한 나의 아버지와는 달리 내 모든 필요를 채우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는데, 나는 그렇게 부르는 게 유난히 좋았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살아있으나 죽은 것 같았던 내 육신의 아버지를 대신해서 내가 의지했던 유일한 존재였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처럼 나는 아버지를 가끔 속으로 OOO 씨라 불렀다. 그를 위해 기도할 때부터였다. 차라리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나았다. 어쩌면 그 시절에 불쌍히 여기느라 원망하지 못했던 아버지를 지금에서야 미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하나님을 자주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라고 불렀고, OOO 씨를 위해 기도했다. 그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그의 남은 삶이 헛되지 않도록.


어쩌면 그것은 나를 위한 기도였는지도 모른다. 그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싶었던 나를 위한. 어쨌든 나는 그를 마음에 품고 기도하며 기대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는 확실히 젊은 시절보다 유해졌고 결혼 전보다는 어른이 된 것 같았다. 그의 일생을 두고 보면 그랬다. 그러나 그가 나의 아버지였던 시절을 돌이켜볼 때, 내가 그에게 기댈만한 구석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면 마음 한 구석이 쓸쓸해진다.


허무한 시절 지날 때
깊은 한숨 내쉴 때
그런 풍경 보시며 탄식하는 분 있네
고아같이 너희를 버려두지 않으리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하리라


멀쩡히 살아계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두고 감히 고아같이 느꼈다고 말하기는 면구스럽다. 고아가 되어보지 않고서야 고아 같다는 말을 쓸 자격도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고아같이 너희를 버려두지 않으리'라는 찬양의 가사에 매일 위로를 받았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는 때마다 나를 위로하셨고, 나는 그 안에서 나의 OOO 씨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이제 글을 쓰며 다시 OOO 씨를 본다. 나의 아버지로서.


허무한 시절 지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어서


* 사진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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