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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May 14. 2024

허당이 사람 잡는다


어딘가 좀 모자라 보이는 사람을 우리는 허당이라고 부른다. 다행히 허당이라는 캐릭터를 유행시킨 건 1박 2일이라는 예능 프로그램 속 이승기라는 사람이라서, 적당히 웃어넘길 수 있는 인간미가 있는 사람 정도의 이미지가 되었다. 이승기는 학창 시절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었고, 외모마저 훈훈했고,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였다.


사람들은 완벽한 이승기의 허당 같은 행동에 웃었다. 그러나 나는 웃어넘길 수 없었다. 내가 바로 허당이었때문이(!). 이승기의 허당 같은 행동으로 인해 매끄럽게 흘러가지 않는 상황을 지켜보며 나는 늘 마음이 불편했다. 나만 예능을 다큐로 시청하고 있었다.


허당의 사전적 의미는 '땅바닥이 움푹 패어서 다니다가 빠지기 쉬운 곳'이다. 누군가는 그곳을 메우느라 고생할 테고, 근처를 지날 때마다 신경 쓰일 것이다. 자칫하면 빠지기 쉬운 허당, 구멍 같은 사람, 그게 나였다.


이승기니까 웃어넘길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였다면 용납될 수 없었겠지. 그러나 감사하게도 당시 내 곁에 있던 사람들은 나를 용납했다. 그들은 나에게 허당'미'가 있다고 말해주었다. 허당이라는 불길한 단어에 '미'를 붙여준 애정에 무한 감사했다.


그들은 늘 경직되고 긴장한 나를 모자란 인간이 아닌 하나의 캐릭터로 취급해 주었다. 그들의 웃음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모자란 사람이라며 비웃는 게 아니라, 이승기를 바라보며 웃어넘기는 시청자들의 무해한 웃음과도 같았다. 그럴 때면 나는 머쓱하게나마 같이 웃게 되었다. 여전히 속으로는 방망이질을 해댔고, 집에 가서는 이불킥을 했지만, 나를 바라보며 웃던 그들의 얼굴은 어쩐지 위로가 되었다.


물론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그런 얼굴들이 하나둘 사라져 갔다. 사회는 냉정한 곳이었다. 업무에서 누군가 실수를 하면, 누군가는 그것을 수습해야 한다. 스스로 수습하는 동안에도 분업과 상호작용이 필수인 조직에서는 너그러이 기다려줄 수가 없다. 우리는 한 명의 인간이면서도 시스템 속에서 각자의 몫을 해내야 하는 사회인이다. 1.5인분, 2인분까지 해내는 것 같은 유능한 동료들 속에서 나는 1인분의 몫마저 겨우겨우 해내는 사회인이었다.


그러다가 유퀴즈에 나온 김대호 아나운서의 인터뷰를 보았다.


"왜 1인분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0.2의 인간일 수도 있거든요."


1.8의 몫을 해내야 하는 사람이 들으면 대노할 발언이다. 나는 0.2의 인간이면서도 자기 객관화라는 명목으로 1.8을 해내야 하는 사람 입장에서 나를 바라봐왔다. 그래서 저 발언은 0.2의 인간인 내가 감히 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김대호 아나운서는 0.2의 인간 입장에서 저 발언을 했다. 물론 그는 현재 10인분의 몫을 해내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의 발언은 나의 그릇을 이해하고 과한 자책과 채찍질을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내가 가진 능력보다 일을 덜하지는 말되, 능력이 부족해도 그만큼의 몫을 다하면 괜찮다는 말이었다.


괜찮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의 용납에서 오는 말어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내가 나에게도 건넬 수 있는 말이었다. 다만 내가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가능한 말이었다. 어쩌면 나는 수많은 구멍을 안고도 부득불 평평한 사람이라고 우기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내가 없으면 어쩔 뻔했어."


함께 길을 가던 남편이 헤매던 나를 쓱 붙잡으며 말한다. 나의 고맙단 말에 그의 어깨가 으쓱한다.


허당이 사람 잡는다. 내게 꼭 필요한 사람의 손을 잡는다. 내게 베푼 그들의 자비를 잡는다. 용납의 마음을 잡는다. 나의 부족함에 집중할 때는 반드시 미끄러져 빠지고 말지만, 내게 내민 손길의 따뜻함에 집중할 때 그것은 구원의 요새가 된다. 텅 비었던 그곳은 어느새 가득 메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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