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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내 꿈의 무게를 안다면

by 조이


어느 대안학교의 교가라고 했다. 아름다운 멜로디에 아이들의 목소리가 더해진 합창으로 이 노래를 처음 만났다. 별생각 없이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노래의 첫 소절이 얼마 전부터 체증처럼 가슴팍 어디쯤에서 자꾸만 거슬렸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남편이 구입한 소설책을 읽던 중 같은 문장을 발견한 때부터였다. <꿈꾸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게 인간이다.> 나는 턱 걸려 넘어질 뻔한 것처럼 멈칫했다. 다음날 출근길에도 이 문장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문장은 전에 들었던 멜로디가 되어 가슴통에 울려 퍼졌다.


'꿈꾸지 않으면 정말 살 수가 없나? 그럼 내가 살아온 건 뭐지? 나는 살아도 산 게 아니었나?'


본 적 없는 것은 떠올리지 못한다. 창의도 상상도 본 것들을 토대로 짓는다. 아무리 떠올리려 해 봐도 떠오르지 않고, 가지려 해 봐도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소거하듯 내가 취해도 될만한 것들을 골라내는 삶이었다. 그러나 내가 꿈꾸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꿈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탓이리라.


배운다는 건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 가르친다는 건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 우린 알고 있네 우린 알고 있네 / 배운다는 건 가르친다는 건 / 희망을 노래하는 것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바꿔 말하면 꿈을 꾸는 건 배운다는 것. 꿈이라는 건 이뤄내야 하는 것인 줄 알고, 이뤄내지 못할 것 같은 꿈은 꾸지 않고, 나와 어울리지 않는 꿈은 꿈조차 꾸지 않고 살았는데... 꿈을 꾸는 건 배우는 것이라고 한다. 겸손히 배우려는 한 꿈을 꿀 수 있다는 말인가.


취업준비를 할 때 잠시 꿈꿨던 승무원이라는 꿈은 내게 꿈이 아니라 허상이었다. 돌고 돌아 진짜 꿈을 찾고 보니 그 차이가 명백하다. 그러나 그렇게 발견한 귀한 꿈도 얼마든지 허상이 되어버릴 수 있음을 알았다.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아닌 집착을 하는 순간 꿈에서 멀어져 버린다.


그렇게 멀어져 버린 꿈을 마치 떠나보낸 것처럼 눈길도 주지 않고 살아가다가 만난 문장이었다. 꿈을 찾았다고 설레던 순간, 아니 찾기보단 마침내 운명을 받아들인 역사적 순간,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기처럼 어설펐어도 주체적이던 순간의 감격도 잊은 채 살다가.


감격을 잊었다고 해서 꿈을 잃은 건 아니었다. 다만 그건 태세의 문제였다. 홀로 실망하고 풀 죽어있던 나의 모습은 자기 체급에 맞지 않는 역기를 들려는 선수의 모습이었거나, 다 배우기도 전에 가르치려 드는 풋내기의 모습과도 같았다.


배움이란 게 더 이상 학력으로만 증명되지 않고, 배운 사람을 지칭할 땐 그의 말과 행동을 기준으로 삼듯 꿈을 꾸는 과정에서도 겸손해야 한다고 나는 나를 타일렀다. 내가 꾸는 꿈은 그저 날개 달고 훨훨 날고 싶은 꿈이 아니니까.


무거운 물건을 들 땐 무릎과 다리도 그만큼 굽혔다가 일어나야 한다.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힘을 잘못 줬다간 허리를 삐끗하고 만다. 들려하지 않았을 때보다도 못한 상태가 되어 걷지도 뛰지도 못하는 부상을 입고 만다.


마음의 부상도 이와 다르지 않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욕심을 부려 꿈을 잘못 들면 꿈에게 상처를 받고야 만다. 꿈을 잘못 든다는 건 잘못된 시도보다도 잘못 먹은 마음일 때가 더 많다. 들썩들썩한 마음을 잠재우는 유일한 방법은 내 꿈의 무게를 아는 것이다.


그러나 꿈을 꾸는 건 단순히 짐을 지는 것과는 다르다. 언젠간 반드시 들 수 있으리라는 꿈, 저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고 싶다는 꿈. 그런 꿈은 기꺼이 각오를 다지게 한다. 그러니까 꿈을 꾸는 건 배운다는 것. 그리고 배우고 배우다 누군가에게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그것은 바로 희망을 노래하는 것.


꿈꾸지 않으면(양희창 작사/ 장혜선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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