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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Aug 15. 2021

불씨

브런치X저작권위원회응모작 - 성냥팔이 소녀

  자시가 넘은 밤, 개화일보 인근 대폿집에서 동기와 잔을 기울이던 강형중은 술벗이 용변을 보러 간 사이 담배를 태우러 밖으로 나왔다. 삼삼오오 모여 희끄무레한 연기를 뿜어내는 무리를 피해 담벼락에 기대어 선 강형중은 외투 앞섶에서 담배 한 갑과 성냥을 꺼냈다. 담뱃대를 비스듬히 입에 물고 성냥을 그으려는 찰나, 주점 맞은편에 위치한 요정 앞에서 회동하는 사내들이 눈에 띄었다. 머리를 말끔하게 뒤로 넘기고 호탕하게 웃는 소리 하며 하얀 와이셔츠에 각이 잡힌 새카만 정장을 입은 차림을 보아하니 구정을 맞아 친목이라도 다질 요량으로 나온 정계 인사들 같았다. 개중에는 사업가로 보이는 인물도 있었는데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의 입에 물린 담뱃대에 불을 붙여주며 연신 허리를 굽히는 모습이 마치 범 앞에 꼬리 치는 하룻강아지가 따로 없다고 생각하며 강형중은 혀를 찼다.

  “일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년들이 요새는 뱀처럼 머리를 빳빳이 세웁니다.”

  노인의 담배에 불을 대주던 중년배가 토로를 하듯 내뱉었다. 그의 말에 별 감흥이 없다는 듯 노인은 예의 담담한 얼굴로 담배를 툭툭 털었다.

  “아직도 그런 불상사가 있단 말이지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치마폭에 성냥을 숨기고 토낀다 하여 불여우라고 부른다지요. 노인은 웃음을 흘리며 말을 붙였다. 중년배는 노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치를 살피다 본론을 꺼냈다. 최근에 공장에서 사업 부진이란 명목 하에 최고 삼 할까지 임금을 삭감하자 직공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파업을 준비한다는 것이었고, 과거 인천에서 일어났던 공파업과 같은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 직공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인즉슨 임금 인상을 위해 예치하던 지원금을 늘려달라는 말이었다.

  “성냥이나 파는 놈들 배를 불리자고 따로 시책을 마련해달라는 말입니까.”

  노인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개새끼들.”

  사람을 거리낌 없이 행동하게끔 하는 것. 그것이 취기의 유일한 장점이자 치명적인 단점일 것이다. 강형중이 똑바로 선 채 노인을 노려보면서 뇌까리자 금세 정장을 입은 사내 대여섯이 주위를 둘러쌌다. 사내들 틈으로 보이는 노인은 웃고 있지 않았고 눈 한번 깜빡이는 사이에 주먹 하나가 날아들었다. 그리고 주먹이 하나 더. 그다음엔 대폿집 입간판이 걸린 흑색 기왓장 너머로 보이는 검푸른 하늘. 그다음엔 앞코가 뾰족한 독일제 구둣발.

  하염없이 날아드는 구둣발 사이에서 강형중은 혜수를 떠올렸다.

  1917년 인천 금곡동에 설립된 조선인촌주식회사를 중심으로 해방 이전의 조선 땅에는 일제의 감독 하에 무수히 많은 인촌공장이 세워졌고, 혜수는 논현동의 어느 항구 가까이 위치한 공장에서 일하던 여직공이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의탁할 친인척 없이 어릴 때부터 공장에서 일했지만 인촌공장 바닥에 널린 게 그런 불우한 가정사였으므로 어느 누구도 그녀를 가엾이 여기지 않았다. 동정이나 베풂 같은 따뜻함은 품이 드는 일이라 공장에는 바쁘게 재촉하는 걸음소리만 가득했다. 소년들은 성냥을 만드는 일, 그러니까 감독관이 수주하여 가져온 이태리산 포플러 나무를 도끼로 쪼개고, 얇게 갈아서 쌓은 뒤 짤막하게 자르고, 미각기로 결을 맞추고, 규조토, 유리가루, 유황과 아교 따위를 골고루 섞어 성냥개비 머리에 바르는 일을 했고 소녀들은 소년들이 만든 성냥을 골고루 나누어 동네에 나가 파는 일을 했다. 성냥 한 갑은 쌀 한 되. 혜수는 매일 수십 개의 성냥갑이 든 보따리를 지고 공장을 나섰다. 성냥을 찾는 사람은 많았다.

  “다른 곳에도 불이 붙나 보고 싶은데, 아가씨.”

  성냥 대신 다른 걸 찾는 사람 또한 많았다. 혜수의 머리카락에서는 언제나 유황 냄새가 났다.

  형중은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추어 나오는 성냥개비에 두약을 바르는 일을 하는 소년공이었다. 혜수는 하루치의 몫을 팔고 돌아오면 공장이 닫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형중을 데리고 나왔다. 골목 어귀에 붙어 서서 앞섶을 뒤적거리던 혜수는 여느 날과 같이 성냥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여보였다. 형중은 혜수의 손 안에서 이리저리 일렁이는 작은 불씨를 바라보았다. 처음에 형중은 매일 같이 성냥 한 개비를 몰래 빼돌리는 그녀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다른 한편으론 염려도 되었지만 혜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게 은연중에 느껴졌지만 그 또한 연유를 묻지 않았다. 혜수는 입에 풀칠하기에도 변변찮은 살림을 꾸리고 있었으나 공장에서 일하고 받는 삯을 모아 책을 한 권씩 사고 있었다. 끼니는 거르면서 글은 읽는 혜수는 궁색한 티 하나 내지 않았고, 형중은 그런 혜수의 얼굴을 볼 때마다 작은 빛 한 가닥을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다. 혜수가 무슨 생각을 하냐 물으며 또다시 성냥을 켰다. 작은 도깨비불 같은 것이 두 사람 사이를 밝혔다. 형중은 대답 없이 작은 불씨를 눈으로 가만가만 좇았다. 도깨비불에 대고 소원을 빌면 들어준다는데. 형중이 중얼거리자 혜수가 그게 아니라면서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도깨비불은 도깨비가 인간을 팔아먹으려고 등불로 만든 거래.”

  형중이 소름 끼친다는 얼굴을 하자 혜수가 덧붙였다. 도깨비는 장난이 심해서 인간이 소중하게 여기는 걸 숨겨버린대. 불씨가 작아질 때쯤 혜수는 성냥을 흔들어 불을 껐다. 그러고는 내일 다시 일을 나가야 하니까 한시 빨리 집에 가서 잠을 청하라고, 웃는 얼굴로 형중을 돌려보냈다.

  이튿날 인촌공장에서의 소동은 많은 직공들의 뇌리에 남았을 것이다. 사전에 아무런 예보도 없이 조선인촌주식회사의 대대적인 실태조사가 시작되었고 허리춤에 경봉을 찬 순사들이 무표정을 한 채 들어섰다. 노동자 근무 태도 및 역량을 조사한다는 명목 아래 실시한 여우 사냥이었다. 인촌생산사업은 일제의 근대화 추진계획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외부에서 성냥을 파는 여직공들이 감독의 시야를 피해 적지 않은 양의 성냥을 빼돌려 쌀 한 되를 받고 처분하다 발각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기회에 공개적으로 색출해내려는 속셈일 거라고 형중은 생각했다. 순사들에게 붙들린 채 집행소로 끌려간 이들 가운데 혜수도 있었음을 형중은 알지 못했다. 이후에는 근거 없는 소문만 무성했다. 남자아이는 손가락을 자르고 여자아이는 머리카락을 잘랐다느니…… 감옥에 그냥 집어넣었다느니…… 끌려간 직공들은 모두 돌아오지 않았으니 사실을 확인할 길은 없었다. 괴상하게도, 성냥을 팔려는 소녀들은 늘어나기만 했다.

  노인이 혀를 끌끌 찼다.

  “글쟁이가 이렇게 입이 험해서야 원.”

  사내 하나가 강형중의 몸통 위로 신분증을 던졌다. 구경꾼이 모여들었는지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강형중은 지금은 그냥 혜수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노인은 피우다 만 담배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고는 중년배와 사내들의 호위를 받으며 자리를 떴다. 강형중은 엷은 신음을 내며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언제 밟힌 건지 모르는, 찌그러진 성냥갑을 줍고 잠시 말없이 서 있다가 토막 난 성냥 하나를 꺼내 들었다. 어디에선가 유황 냄새가 났다. 대폿집에서 가느다랗게 흘러나오는 옛 가수의 노랫말이 유황 냄새와 한데 섞여 강형중의 목구멍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성냥을 켠 강형중은 작은 불씨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새빨갛게 타들어가는 성냥 머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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