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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선화 Jul 07. 2016

1. 기쁨은 왜 혼자가 될 수 없는가

기쁨의 순수함을 모르는 슬픈 영혼

자유는 나에게 팔을 벌리며 기쁨을 어서 누리라고 웃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무척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드디어 종강과 동시에 방학을 맞이했다. 그 이후로도 소논문 및 작품론을 써야 하는 과제가 있어 며칠 더 밤새긴 했지만 시험이라는 '익숙하지만 낯선' 공포가 사라지니 한결 마음이 가볍긴 했다.


시험기간에 공부를 물론 열심히 하긴 했으나(이번에 가장 높은 성적을 받았다), 가장 나의 욕망을 잘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공부가 안 된다 싶을 때, 방학이 되면 무엇을 할지에 관해 고민을 했기 때문이다.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철학책 읽기.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깊이 공부해본 적은 없으나, 내가 예전부터 해오는 생각들이 결코 일반적인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고, 내가 가진 시선들, 고민들의 해답을 철학적으로 풀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서 철학 관련 책을 꼭 읽어봐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다소 부족한 영역, 특히 역사에 대해 공부를 해야겠다고도 마음먹었다. 여기까지는 어떻게 보면 형식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고, 사실 언제부턴가, 예전부터 좋아하긴 했으나 이번에 제대로 빠지게 된 가수가 생겨서 그 또는 그들에 관한 정보를 많이 찾아보고 즐겨야겠다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었다. 하루라도 안 보면 섭섭할 정도로 공부를 하다가도 무대 영상을 슬쩍슬쩍 보았다. 시험이 끝나자 봉인 해제된 것처럼 내 앞을 가로막던 자물쇠들이 하나 둘 열리더니 방대한 양의 자료들이 나에게 인사하였다.


그렇게 빠져 살길 몇 주, 나는 어느샌가 마음속에 조용히 기회를 기다리던 어떠한 '욕망'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것'은 나를 다른 사람들의 옆자리에 억지로 앉혀놓고는 '이대론 부족하지 않아? 너도 다른 사람들처럼 더 많은 걸 누려야지.'라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욕심이 커질수록 내가 최대치까지 따라가지 못한다는 현실에 대한 자괴감이 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왜 지인도 아닌 먼 곳의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괴로워하면서 관심을 가지는가에 대한 고민을 안 할 수 없었다. 왜 순수하게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지 못 하고 힘들어하는 것인가? 늘 '욕심'과 '미련'이 짝을 지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앉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또한 누군가의 깊은 내면이나 삶 자체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이 여기서 오작동을 일으키는 것 같다. 사실 나는 내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을 잘한다. 나는 내가 제일 잘 알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실망감이나 허탈감 등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타인에 대한 것이 되어버리면 그 부정적인 감정들이 더욱 크기가 크게 느껴진다. '사람은 누구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보니, 나도 사실 이렇게나 추악하고 부끄러운 인간인데, 저 사람은 또 어떨까'라는 생각에 사람을 보는 시선이 사뭇 달라지는 것이다.


비단 사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목표를 세우고 고난에 맞서는 가슴 뜀을 느끼며 성취에 다다른다. 그러나 기쁨과 동시에 싸한 느낌을 늘 지울 수가 없었다. '성취'란 바라던 것을 이루어낸 것과 동시에, 그동안의 노력의 과정들이 진행이 아닌 완료가 되는 것이다. '상승 정지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달리던 사람이 더는 성취해야 할 목표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 심리적으로 허무해 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물론 모든 사람이 겪는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나의 인생 테마에는 이것이 안타깝게도 껴있는 것 같다. 허무한 끝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 마저도 이미 방황하여 흔들린다. 타인과의 비교로부터 오는 자격지심, 자존심과 함께 타오르는 욕망, 그러나 지울 수 없는 불안감 등은 결국 사라지기 위해 존재하면서도, 존재하는 그 순간 순간 너무도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허무를 향한 고통이라니, 이 곳에서 잠깐이라도 느끼는 기쁨은 과연 주연이라 할 수 있을까, 조연이라 할 수 있을까?


'순수하게 그 자체를 바라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여기저기서 배웠거늘, 이미 내 머릿속의 체계는 그 자체를 두고 여러 번 뒤집고, 볶을 수밖에 없게 만들어진 것 같다. 나도 무언가를, 또 누군가를, 순수하게 기뻐하고 좋아하고 싶다. 나에게 찾아오는 기쁨은 늘 빠르게 뛰는 심장 고동과 함께, 포장된 근심을 남겨두고선 등을 돌려버린다. 사람을 좋아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모순의 굴레와 기쁨을 반기지 못 하는 불편함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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