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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한엄마 Oct 16. 2021

헌법 책을 들고 있었을 뿐

7기 신나는 글쓰기(9)

 최근까지 남편은 내게 얘기한다.

 “와~니네 엄마 진짜 무서워. 아빠한테 어떻게 한 줄 알아?”

 때는 2001년 2학기 헌법1이라는 전공과목을 새로 시작할 그 때였다. 아니다. 벌써 20년도 전 이야기니까 자꾸 헷갈린다. 권영성 회색 헌법책이 가장 두꺼웠을 시절이였고 헌법은 1과2로 진행되는데 남편은 그 당시에 카츄사에 있어 주말이나 격주로 만났다. 근데 그 때나 가을이었는지 봄이었는지 가물가물하다. 2001년 가을 내지는 2002년 봄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 때 대학로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 당시 매일 만나는 게 아니라 군인 아저씨가 된 남편을 가끔씩 만났으니 얼마나 설레였을까. 나는 역시나 일찍 나와 남편을 기다렸다.

 근데 남편은 오지 않고 이상한 남자들만 엵었다.  예전에 이태원에서 나를 기다리게 만들었는데 무슨 액션영화 아니면 무슨 LA 클럽 앞을 지키고 있는 흑인 보디가드 같이 생긴 우락부락한 아저씨가 내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한 말이 “Do you want?”였다. 그렇게 남편은 사람을 기다리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대학로에서도 남자친구라는 남의 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남자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당시 나름 괜찮게 생겼는지 뜬금없이 다가오는 남성들이 많았으니까. 그 때도 내 옆에 성큼 남자 한 명이 앉았다. 

“옆에 자리 있어요?”

“남자친구 기다려요.”

라고 말 했다. 유리를 통해 건널목이 보이는 길 앞에 뚫어져라 남의 편이 언제오나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아까 말을 건 남자가 내 속을 뒤집는다.

 “내가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해요. 띠벌”

아, 무섭다. 모르는 사람이 욕을 하니 무섭다. 그 당시 핸드폰이 분명히 있었을 거다. 전화를 했다. 남의 편한데..전화를 안 받는다. 나도 같이 내뱉고 싶었다. 띠벌.

 “진짜 기다리는 거 맞아요? 왜 사람을 무안하게 해?”

 와. 안 되겠다. 자리를 옮겨야겠다. 이미 만나기로 한 시간의 10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래서 남자들이 여자를 먼저 기다리는 이유가 있었구나. 정말 무섭다. 나름 나도 예쁜 여자인데 똥인가 보다. 똥파리만 꼬인다. 아마도 내가 만나려는 이 남자친구도 똥파리 중에 하나인가. 정말 내가 이 꼴을 당하고 있는 건 아는 것인가? 상상도 안 되나? 나의 어여쁜 여자친구가 당신을 오매불망 기다리다가 어떤 껄렁거리는 남성에게 엵어서 이런 욕을 받아 먹으며 모욕당하고 있는 걸 아는가? 전화도 받지 않고 오지도 않고 옆에서 남성은 기다리지도 않는 남자를 기다린다고 거짓말을 하는 이상한 여자 취급을 하고.

 그런 와중에 남의 편을 발견했다. 와, 다행이다. 이제 들어오는구나. 남의 편이 들어와 나를 찾고 나는 오래 기다렸다며 살짝 투덜대면서 나를 희롱하고 모욕했던 남자에게 눈빛으로 레이저를 쎄게 보내면서 나가면 되는 결말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들어오다가 건널목을 건너는 게 아닌가! 이게 아닌데? 나는 정말 있는 힘을 다 해서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와 건널목을 건너고 있는 남의 편 등짝 쪽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내 기다림과 모욕과 무서움과 짜증을 다 합쳐서 손에 들고 있는 권영성 헌법 책으로 등짝을 후려쳤다.

 “퍼~~억!!!!!!!”

 남편은 건너고 있다가 뒤를 돌아보더니 눈물이 가득 찬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결론은? 남편은 나를 만나기 전에 과민성 대장증후군 같이 속이 좋지 않아서 만나서 약을 사러 가기 그러니 그 전에 약을 먹고 나를 만나려고 했다고 한다. 길 건너편에 서울 대학 병원 진단서를 받는 아주 큰 약국이 있었다. 내가 쎄게 때린 덕분에 나올까 말까 했던 그 설사도 쏙 들어갔단다.

 등이 퍼렇게 멍이 들 정도로 맞고도 결혼한 남편도, 오래 기다라고 온갖 수모를 준 남편, 춥다고 하면 자기가 더 춥다고 하는 남편임에도 좋아하는 것 보니 나도 찐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결혼했다. 잘 살고 있다. 지금 내게 말 걸어주는 남자는 없다. 좋았을 때다.



저는 4시에 누군가와 만나게 된다면 3시부터 행복해지기는 하겠지만, 보통 오전 9시부터 설치는 스타일입니다. 긴장을 심하게 하는 편이라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엄청 일찍 일어나서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약속 시간 보다 최소한 1시간 일찍 장소에 도착해요.

근처에 대형 서점이 있다면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책을 읽는 편이기도 합니다. 그런 걸 보면 저는 예전에 누군가와 약속을 하면 거의 대형 서점 주변을 골랐던 것 같네요. 그게 저만의 패턴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만약에 오후 4시에 누군가와 만나게 된다면 여러분은 4시 이전까지 어떻게 시간을 보내시겠어요? 아침부터 4시까지 여러분의 동선을 보여주세요. 무엇을 준비할 것이며 마음을 어떻게 차분하게 유지하시겠어요? 어린 왕자처럼 안달 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참고 문장)   

            「가령 오후 4시에 네가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갈수록 난 더 행복해질 거야. 4시가 되면, 벌써, 나는 안달이 나서 안절부절못하게 될 거야. 난 행복의 대가가 무엇인지 알게 될 거야! 그러나 네가 아무 때나 온다면, 몇 시에 마음을 준비해야 할지 알 수 없을 거야…. 의례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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