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잔해 위에 피어난 독립의 새
이혼을 얘기했다. 장난인 줄 알았나 보다.
“몸만 나가라”고 했다.
따로 살거나, 서류만 정리한 채 겉치레로 부부를 연기하자고 했다.
아니다. 나는 정식으로 독립을 원했다.
“그럼 아이들은 누가 키워?”
“나도 엄마니까, 내가 키우지.”
서로 부모님에 대한 예의는 그대로 지키기로 했다.
하지만 부부 관계는 이미 파탄이었다.
이혼숙려 캠프처럼 서로 상처 주고, 미워하고,
사랑을 증오로 바꿔야만 끝이 나는 관계라면 —
그건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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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아한 이혼’을 하고 있다.
우리가 사랑했기에 한 가정을 이룬 건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부모님을 내 부모처럼 모셨다.
사실 남이기에 더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모셨다.
며느리답게는 모셨지만, 친딸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어떤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사회적 존재로서 마네킹 같은 느낌이었다.
같이 슬픔과 기쁨을 나누는 정서적 공동체가 더 이상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감정을 공유하던 대상은 초등학교 2학년 막내였는데,
그조차도 이제는 거짓이었다.
나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보다
‘달라질 수 있음’을 바라보며 설득하려 했다.
그 순간 이미 지쳐 있었다.
우리 관계는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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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인 파탄을 주장했지만 그는 달랐다.
겉으로 함께 있음을 연출해 혼인 유지를 증명하려 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이혼이 정식으로 성립되기 전까지 같은 공간에는 있지 말자.”
그렇게 별거 시한을 11월로 잡았다.
그런데 우연처럼, 내가 가지 않은 친정의 추석 방문에서
그의 무릎이 두 동강 나는 사고가 일어났다.
친정은 사위의 사고를 도의적으로 여겨
한 달간 숙식을 제공해 주었다.
그사이 나는 오랜만에 ‘나’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가 돌아온다는 통지를 받았다.
허락이 아닌 ‘통지’였다.
나는 결심했다.
이제, 진짜로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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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독립을 선언했다.
재산 분할로 집을 차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점거’가 아니라 ‘자립’을 택했다.
아직 그의 이름으로 된 그 집을 떠나,
내가 온전히 나로 있을 수 있는 공간을 찾았다.
가방 하나 들고 뚜벅뚜벅, 그 길을 걸어 들어갔다.
두려웠다.
하지만 두려움보다 더 큰 건 —
누군가의 허락 없이 ‘살고 싶은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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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마흔.
나는 늘 ‘착한 사람’으로 불렸지만,
사실은 언제나 누군가의 보호 아래 있던 아이였다.
결혼 전엔 친정 엄마가, 결혼 후엔 남편이.
그들은 나를 보호한다고 믿었지만
사실 나는 그들의 말과 감정에 휘둘리며
끊임없이 에너지를 쓰며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이제야 안다.
나는 연약하지 않았다.
그저 내 목소리를 너무 오래 감추고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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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 나는,
나를 누르며 높아지려는 모든 관계의 손을 놓았다.
그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빛으로 서 보려 한다.
보통 스무 살이 되면 성인이라 하지만
나는 마흔이 되어서야 성인이 되었다.
늦었지만, 지금이야말로 가장 맞는 시간이다.
이건 나의 시간,
그리고 카이로스 — 신이 정한 결정적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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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누군가의 아내가 아니라 나 자신의 사람으로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