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바퀴 달린 침대에 누운 채로 실려 검사실로 가는데 이송 직원이 내 몸 위에 얇고 빳빳한 흰색 이불을 덮어줬다. 이런 걸 덮기엔 좀 이르지 않나요? 아직은 살아있는데...... 심지어 검사실 앞에 도착했더니 대기 장소에 나랑 똑같은 상태로 운송된 환자들이 쪼로록 나열되어 있는 거다.
어라... 이거 나란히 있으니까 좀 더 그렇지 않나. 게다가 딱히 할 일도 없으니 다들 눈을 감고 고개를 빳빳이 천장 쪽으로 하고 미동도 없이 누워 있다.
흰색 이불이 문제다. 아무래도 색을 좀 넣는 게 좋지 않을까. 빨간색만 아니면 되지 않나. 빨간색이면 명정이 된다. 하얀 수시포보다 한 술 더 뜨는 거다. 그럼 역시 파란색인가.
지루한 대기 시간에 천장 무늬를 세면서 이런 생각을 하지만 내 옆에 누워있는 동지들 중 누구도 이런 농담을 반기진 않을 것이다.
아직은 살아있고 언젠가는 죽을 같은 운명의 동지들. 태어난 사람은 다 운명공동체다. 그러니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려고 노력 중.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누굴 미워하는 시간이 얼마나 큰 낭비인지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너도 나도 100년 후엔 다 이 세상에 없어요. 재가 되어 있을 거예요(우리나라의 화장률은 최근 자료 기준 93%가 넘는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죽음은 얼마나 터부시되어있는가. 때로는 그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꺼리며 눈을 가리고 숨으면 피할 수 있으리라는 어떤 미신적이고 주술적인 믿음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하여 요즘은 일종의 죽음 전도사가 되어 '우리는 다 죽어요. 그러니 지금 여기서 충분히 살아갑시다.' 라고 제창하고 있는데 덕분에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져서 종종 나의 생사를 확인하는 안부전화를 받곤 한다.
하시다 스가코 선생님의 책에서 읽은 그녀의 소망처럼 '그 사람, 소식이 없더라니 죽었다고?' 라는 느낌으로 떠나고 싶었으나 이제 글렀다. 빈곤한 삶에 인복만은 분에 넘쳐 오늘도 감사와 사랑을 보냅니다.
이제 1년 후면 또 맛없는 병원밥을 얻어먹으러 가야 한다. 중환자실은 여전히 재미없을 것이고, 옆자리 보호자 침대엔 또 밤새 코를 골고 잠꼬대로 발작하는 아저씨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지난 입원 중 덕분에 밤 사이 열세 번쯤 소스라치며 깨고 신경쇠약을 얻었다).
언제쯤 제 상태로 회복할 수 있을지 감도 안 오니 회사에 휴직계는 언감생심, 사직서를 미리 내야 한다. 죽도록 지루하고, 아프고, 어지럽겠지만 죽지는 않았으면. 죽더라도 그전에 고독사하지는 말았으면.
그러나 그건 내가 바란다고 되는 일이 아니니. 바라건대 적어도 오늘이, 내일 죽어도 후회 없는 하루가 되길.
우리는 다 죽어요. 그러니 우리의 오늘이 후회 없길.
우리는 다 죽어요. 그걸 모르고 낭비하지 않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