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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선 Sep 06. 2023

타자기 소리로 시를 적어 보내

 내 귀한 재산 목록에는 낡은 타자기가 있다. 대학 시절 학생회 사무실에서 찾아낸 물건이다. 주인도 없고 필요한 사람도 없어 버리자길래 내가 가져왔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르게 캐비닛 구석에 있던 것인데 케이스에 적힌 이름표를 보고 검색해 보니 사라진 동아리의 이름이 나온다. 아마 그곳에서 사용하다 동아리가 폐부 되며 다른 짐과 함께 버려졌고 누군가 정리하러 들어갔다 사무실로 챙겨 온 것이 아닐까. 나처럼 쟁여놓기 좋아하는 사람이. 검색한 대로라면 2000년대 초반까지도 있던 동아리니 그때에는 가져가긴 쓸모없고 버리긴 아까운 골동품이었겠지.


 자판 자체는 컴퓨터 키보드와 같은데 그냥 누르면 자음과 모음이 옆으로 나열될 뿐이라 한참 만져보고서야 그럭저럭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받침은 글자 아래 받침 자리로 가게 하는 받침 버튼을 눌러야 하고 레버를 이용해 줄을 바꿀 때 옆으로 밀어 첫 글자를 쓸 자리로 옮긴다. 어느 정도 익히고 나니 비로소 내 것 같아 본체와 붙어있는 케이스 아랫부분의 나사를 풀어 분리하고 케이스를 물로 씻었다. 케이스 밑판과 타자기 본체를 다시 조립하는 것만으로도 고생했었다.

 

 할 일 없는 저녁에 타자기를 꺼내 짧은 시를 필사하는 것이 여전히 소소한 취미다. 타닥타닥 손 가는 대로 나는 소리와 손끝이 얼얼해지는 타격감. 시를 한 편 필사하면 마음도 가라앉는다. 백스페이스가 없으니 신중해야 하고 오타 없이 완성된 종이 한 장이 꽤나 뿌듯해진다. 이런 게 진짜 이너피스.


 촌스러운 국방색 케이스지만 뚜껑을 열면 쨍하게 예쁜 하늘색이 드러나 몇 배는 반갑고 예쁘다. 훅 올라오는 기름냄새마저 좋아서 들뜬다. 쓰다보니 글자가 흐려져 새 잉크 리본도 샀다. 잉크가 진해지면 키를 덜 세게 눌러도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빗나갔지만 확실히 전보다 선명하게 써진다.

 유튜브로 사용법을 설명한 영상도 보았다. 이렇게 마니아층이 있는 물건일 줄 왜 짐작 못했을까. 가장 궁금했던 줄 간격도 조절할 줄 알게 되었다.


  한 글자 한 글자 눌러서 찍는 글은 왠지 누군가에게 보낼 편지 같은 기분이 들어서 좋다. 글을 자꾸 써야겠다. 혹은 아무 글자라도. 옮겨 적을 마음에 드는 시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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