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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민 Nov 16. 2015

내 인생에 필요한 돈의 양

내가 죽을 때까지 필요한 돈은 얼마일까?

박타푸르 광장   


아빠의 이야기      


“지민아, 돈 좀 줄래?”


저녁을 먹고 담배를 피우기 위해 잠깐 음식점 밖으로 혼자 나왔다. 열 살이 갓 넘어 보이는 소녀가 등에는 동네에서 주운 쓰레기를 한 짐 지고 내게 말을 건다. 네팔 말로 이야기를 하니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손을 입으로 가져가는 행동에서 간신히 알아차렸다. 내게 돈을 달라고 구걸하는 것이었다. 박타푸르 지역은 특히 지진피해를 많이 본 곳이다. 지진으로 오래된 벽돌 건물들의 반 정도가 부서지고 이 지역에서만 300명 이상이 죽었다. 휴일이라 모든 상점이 일찍 닫는 바람에 이미 주변은 어두컴컴하다. 음식점 앞 조명만이 소녀의 얼굴을 비추는데 그 눈빛이 너무 애처로워 뿌리칠 수 없었다. 뭐라도 내어주고 싶었지만 내 주머니엔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네팔 돈은 지민이가 가지고 있었다. 들어와 지민이에게 돈을 받아 나오니 이미 그 소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도 내가 잠시 들어온 사이 음식점 주인이 쫓아버린 것 같았다. 우리나라 돈으로 천 원 남짓 되는 100루피를 들고 다시 안으로 들어오니 허망함이 몰려든다. 과연 돈이 무엇이기에 그 소녀가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들었을까.


'욕망의 집어등'. 어느 철학자가 현대의 자본주의를 한마디로 표현했다. 집어등을 향해 달려오는 오징어는 자신의 하나뿐인 목숨을 잃는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도처에 널린 유혹의 불빛을 기웃거리며 불빛에 몸을 던지기 위해 가진 돈을 잃는다. 그리고 다시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인생인 ‘시간’을 팔게 된다. 현대의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의 대가로 돈을 받는다. 세상에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 많다고 말하지만, 결국 현실에서는 모든 것이 위로금이나 위자료로 환산된다. 그러다보니 가장 중요한 가치판단의 기준이 돈이 되기도 한다.

     

결혼 후 처음 집을 샀을 때가 기억난다. 10년을 학생으로 살다가 박사 학위를 받고 처음으로 취직한 직장은 대전에 있는 연구소였다. 그 때 당시 대전의 집값은 서울의 전세 값보다 쌌다. 대전에서 전세로 생활을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나서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서는 집을 사야한다는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살고 있던 집의 전세 값에 내가 모을 수 있는 모든 돈을 더해서 새 아파트를 샀다. 직장이 있어도 은행의 대출이 쉽지 않았을 때다. 나름대로 계산을 했지만 집을 사고 팔아본 적이 없으니 그에 필요한 부대비용을 충분히 감안하지 못해 당장 가족이 먹고 살 생활비가 부족한 상황이 되었다. 소위 카드 돌려막기로 6개월 정도 버텨서 겨우 갚았다. 그 때의 마음고생 이후로 현금서비스는 물론이고 은행의 대출도 받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대전생활 10년 후에 서울로 이직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살고 있던 대전의 집값은 서울에서 전세를 얻기에도 턱없이 모자랐다. 고생하면서 마련했던 집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또 집 없는 서울생활을 시작했고, 결국 결혼한 지 18년 만에 직장 가까운 곳에 내 집을 마련했다. 


집을 왜 마련하지 않느냐고 성화를 하셨던 부모님을 보면서 왜 우리 사회에서는 집이 중요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벽걸이형 최신 TV를 사면 3주가 행복하고, 새 차를 사면 3달이 행복하고, 새집을 사면 3년이 행복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서울로 이직을 한 후, 내 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방학마다 온 가족과 장기 여행을 떠났다. 식구 4명이 움직이니 꽤나 큰 돈이 들었다. 그 때 그 돈을 모아뒀으면 지금쯤 더 큰 집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끔 든다. 그 때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나는 그저 하고 싶은 것을 한 것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돈을 주고 집을 사느니 돈을 주고 경험을 사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었던 것 같다. 


아들의 취직을 앞두고 이제는 온가족이 함께하는 여행이 힘들겠다는 생각에 뉴질랜드로 캠핑카투어를 떠났다. 온 가족이 작은 캠핑카 안에서 서로 몸을 맞대며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네 명이 모두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지만 마지막 가족여행이 될 수도 있다는 나의 생각에 모두가 동의했다. 2주를 함께 했던 캠핑카는 한 사람이 들어가기조차 버거운 화장실과 작은 조리대를 겸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비좁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며칠이 지나자 온 가족이 완전히 적응하여 어른 넷이 지내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이런 생활을 몇 년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각자 짐 가방 하나씩만 들고 와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도 살 수 있다면, 집은 왜 필요하고, 집을 채운 수많은 짐들은 무엇일까? 법정스님의 '무소유'란 책이 떠올랐다. 사는데 꼭 필요한 것은 많지 않다.

      

평생 사는데 혹은 노후를 보장하는데 얼마의 돈이 필요한지 알지 못하는 것은 내가 어떻게 살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얼마의 돈이 필요한지를 모르니 불안할 수밖에 없고, 불안하니 열심히 돈을 모을 수밖에 없다. 얼마나 오래 살지는 원래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결국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무엇을 하면서 노후를 보낼 것인가? 어떻게 노후를 보내고 싶은지를 정하지 못하면 일할 수 있는 지금 내가 얼마를 벌어 두어야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내게 얼마가 필요한지 몰라 계속 돈을 벌기 위해서만 산다면 어느 날 죽음이 갑자기 찾아왔을 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것만 같다. 나는 죽을 때까지 억울하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 여한이 없는 삶으로 내 생을 마치고 싶다. 살아있는 순간만큼은 행복을 하루에도 몇 번씩 느끼는 삶을 살고 싶다. 그리고 우리 딸도, 아들도,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딸의 이야기   


포카라를 떠나 카트만두로 돌아가는 날이다.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올 때는 주말인데다 전국을 강타한 기름 파동이 심각해 포카라 행 버스 티켓을 구할 수 없었다. 암시장에서 겨우 기름을 구했다는 택시를 웃돈을 두 배나 주고 올 수 있었다. 카트만두로 돌아가는 길에는 용케도 버스 티켓을 구했다. 티켓 가격은 우리가 타고 왔던 택시 가격의 약 1/9. 그만큼 시간도 오래 걸리고 가는 과정도 쉽지는 않았지만, 오는 길에 마을에 있는 휴게소에도 여러 번 들르고 같이 버스에 탄 다른 나라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는 재미가 있었다. 

   

아침 8시에 출발한 버스는 오후 2시 반이 되어서야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처음 네팔에 왔을 때 카트만두를 경험해봤기에 남은 날들은 카트만두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고대 왕국 박다푸르에서 묵기로 했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지만 지난 지진에 크게 피해를 입었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처럼 좁은 골목과 오래된 건물들이 많은 박다푸르는 아직도 지진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벽돌을 쌓아 만든 오래된 건물들의 반은 허물어지거나 무너지기 직전이라 지지대로 건물을 여기저기 받쳐 놓았다. 언제 무너질지 몰라보고만 있어도 불안한 건물들에서 아직도 그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살아가고 있었다.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피곤했던 몸을 쉬다가 느지막이 광장을 가로질러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광장 입구에서부터 여섯 살 남짓한 남자아이가 졸졸 우리 뒤를 쫓아오며 말을 건다. 머리를 박박 밀고 콧물 자국이 선명한 얼굴을 들이대며 손을 내민다. 네팔에 와서 처음으로 구걸하는 아이를 만났다. 얼마를 주어야하나 고민을 하다가도 내가 돈을 주면 이 아이가 계속 관광객에게 손을 내밀고 다니는 아이가 될까봐 한 번 더 깊이 고민을 하게 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망설이다가 적절한 타이밍을 놓쳐 결국 나는 그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뭔가 마음이 계속 불편한 상태로 저녁을 먹으니 음식도 딱히 맛이 없었다.   

 

“지민아, 돈 좀 줄래?”


잠시 나갔던 아빠가 들어와 구걸하는 여자 아이를 보았다고 내게 100루피를 달라고 한다. 한국에서 느끼는 천 원의 가치보다 네팔에서 100루피의 가치는 더욱 크다. 오는 길에 보았던 남자아이 앞에서 망설이다 아무 것도 주지 못했던 마음이 무겁게 남아있어 아빠에게 돈을 건네주었다. 잠시 후 이미 떠나고 없어 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가득안고 돌아온 아빠와 함께 과연 돈이 무엇일까라는 대화를 시작했다. 

 

나는 수학을 포기한 ‘수포자’이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수학에 약했던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수학을 거의 공부하지 않았다. 수학을 포기한 이후 숫자공포증이라도 걸린 듯 모든 숫자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피하기 시작한 숫자를 현실에서 절대 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돈이다. 명확하게는 돈 계산이겠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도 나는 내가 얼마를 벌고 세금을 얼마를 내고 얼마를 저축하고 있는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통장에 돈이 들어오는 낙으로 살아야하는 직장인인데도 숫자로 가득한 급여명세서를 들여다보기조차 싫었다. 매년 찾아오는 연말정산은 더더욱 피하고 싶었다. 통장에서 들어오고 나가는 돈 계산을 하고 싶지 않아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최소한의 용돈을 남겨두고 월급의 대부분을 적금으로 빠져나가게 한 것이었다. 한 달에 정해진 금액을 항상 저축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안도하고, 어쩔 수 없이 돈이 나갈 일이 생기면 그때그때 들어오는 복지수당이나 추가근무수당 등으로 해결했다. 그러다보니 사고 싶은 것이 생겨도 예산을 넘는 경우에는 사지 않았고 점점 내가 쓰는 금액은 최소화 되었다. 그렇게 돈을 모으다보니 넉넉잖은 월급을 받는 공무원으로 근무한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세계여행을 하면서도 숫자공포증은 벗어날 수 없었다. 나의 지출을 매일매일 계산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내가 정했던 규칙은 전체 경비를 정해놓고 다 쓰면 집에 돌아가자는 마음으로 여행했다. 기본적으로 최대한 아껴 쓰겠다는 마음가짐은 항시 가지고 있었지만, 이것만큼은 꼭 해봐야겠다 싶은 일에는 투자했다. 그렇게 내 자신에게 가장 충실한 여행을 하고 8개월 반 만에 집에 오게 되었다. 


얼마 전 어떤 기사에서 연봉 2억을 받는 사람은 살림이 빠듯하다며 울상인데 1년에 50만 원짜리 방에서 아주 약간의 생활비만 벌며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은 만족스럽다고 말한다는 내용을 보았다. 배낭 하나 메고 여행을 하면서 느꼈던 건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는 내가 선택하기에 달렸다는 것이다. 세계여행을 하느라 길 위에서 써버린 돈을 모아두었다면 나는 조금 더 여유로운 결혼 생활을 시작할 수도 있었겠지만, 내가 여행을 통해 얻은 경험은 돈의 가치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의 선택에 만족하고 그 선택으로 만들어진 상황을 수용할 수 있는 유연한 사람이 되고 싶다. 여행을 하면서는 돈을 어떻게 써야하는지에 대해 수많은 선택의 상황을 마주한다. 택도없는 바가지를 쓰고 좌절하기도 하고 나의 실수로 눈 먼 돈을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길 위에 있기 때문에 그 모든 상황을 딛고 일어서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한 발자국 나아갔을 때의 행복은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경험했다. 나는 앞으로도 그렇게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 이런 나에게는 과연 얼마가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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