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떠났을까?
드디어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지민이가 처음 결혼해도 되느냐고 물었을 때, 같이 멀리 떠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일상의 온갖 방해로부터 벗어나 지민이와의 진정한 대화에 집중하고 싶었다.
고래 잡으러 동해 바다로 떠나자는 노래는 많은 사람들이 속초, 낙산, 경포대로 이어지는 동해바다를 찾게 만들었다. 경쾌한 리듬에 맞춰 목 놓아 노래하다 보면 누구나 당장 내일이라도 동해 바다를 향해 떠나야 할 것 같은 마음에 가슴이 설렌다. 수도권에서 가까워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는 서해바다가 아니라, 최소한 1박 이상을 각오해야 하는 동해 바다의 끝없는 수평선과 파랗고 깊은 물 색깔은 그만한 보상을 해준다.
대학시절의 나는 틈만 나면 집을 떠났다. 동해 바다로, 설악산으로 혼자서도 텐트를 지고 수없이 집을 나섰다. 부모님의 모든 말이 잔소리로만 들리던 시절,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찾아 집을 나섰다. 대학생이 된 내게 여행은 부모님의 이해를 구할 수 있는 일종의 가출이었다. 그러나 마치 방황에 가까운 듯한 ‘가출’이라는 이름의 여행은 사실 나 자신을 달래고 진정시키는 자기 성찰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익숙해진 여행이 지금은 내게 취미를 넘어 생활이 되어가고 있다.
시간이 있을 때 무엇을 하고 싶은지, 또는 은퇴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사람들에게 물으면 대부분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한다. 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그토록 떠나고 싶게 만드는 것일까?
인간은 본능적으로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 욕망이 있다. 이 새로움에 대한 갈증이 여행을 통해서 어느 정도 충족 된다. 처음 마주친 장소는 당연히 새롭다. 설령 두 번째 마주친 장소일지라도 어느 계절, 어느 시간에 마주쳤는가에 따라 또다시 새롭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과 일출 및 일몰, 구름의 정도와 기온에 따라 모든 장소는 전혀 다른 풍광이 나타날 수 있다. 여러 번 찾은 장소의 경우 익숙함에서 오는 편안함이 새로운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이렇게 신선한 즐거움에 대한 본능이 집을 떠나 여행을 꿈꾸게 한다.
인생은 BCD라고 한다. 출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선택(Choice)이 바로 인생이다. 수많은 선택들은 되돌릴 수 없고, 그러한 선택들에 책임을 요구하는 인생은 힘들고 피곤하다. 여행은 그 힘든 인생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기에 매력적이다. 패키지여행은 일단 여행상품을 선택하기만 하면 옵션 선택 외에는 내게 어떠한 선택도 강요하지 않는다. 능숙한 가이드를 따라다니면서 즐기기만 하면 된다. 이와 다르게 자유여행은 어디서 잘 것인가, 무엇을 먹을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매 순간 수많은 선택과 그에 따른 불편함이 따르지만 여행의 끝이 정해져 있기에 충분히 감수할 만하다. 따라서 추억을 남기는 것에만 집중하면 된다.
“High risk, high fun.”
미국의 9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후회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했다고 한다. 다수의 노인들이 인생을 좀 더 모험적으로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답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내 인생을 어떻게 하면 후회 없이 살 수 있을까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 내 마음이 동하는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내 딸과 아들 역시 후회 없는 인생을 살기를 원했다. 물론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모험은 바로 여행이다. 그래서 지민이가 혼자 세계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도 말리지 않았다. 물론 불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위험 없는 재미는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행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과 휴식, 특히 자기성찰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와 가는가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여행의 일정이 여유로워야 한다. 어렵게 낸 시간에 제법 많은 돈이 든다고 생각되어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즐기려다 보면 정작 휴식과 성찰의 시간을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얼마든지 일정을 조정하고 다양한 옵션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배낭여행을 좋아한다.
이번 여행의 첫 번째 이유가 지민이와 함께 자유로운 배낭여행을 즐기면서 진정한 대화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었다면, 나만의 두 번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18년 전 보지 못했던 포카라의 설산을 꼭 보겠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네팔이 은퇴를 하고 살 수 있을만한 곳인가를 확인하고 싶었다. 한국의 은퇴 이민자들이 찾는 도시 중에 하나가 포카라라고 한다. 안나푸르나의 설산이 보이는 따뜻한 이 곳이 노년을 보낼 만큼 매력적인지 확인하고 싶었고 소기의 목적을 이룬 것 같다.
“지민아, 난 은퇴하면 안나푸르나가 보이는 가을과 겨울엔 이 곳에 있고 싶다.”
드디어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2주라는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건만, 생각보다 마지막 날이 금방 찾아왔다. 세계여행을 260일 동안 했지만 여행은 매번 떠날 때마다 새롭다. 네팔은 내 인생에서 두 번째이지만 아빠와 단둘이서는 처음이다. 첫 번째로 찾았을 때 나는 고작 12살이었다면, 두 번째로 찾은 지금의 나는 28살이다. 지난번에는 여름이었다면, 이번에는 가을이다. 이처럼 같은 여행지라도 수많은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매번신선하고 새롭다.
내가 기억하는 인생의 첫 번째 여행을 기억해보라면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다. 태어난지 200일 남짓의 내가 아빠 품에 안겨 영월 고씨동굴 앞에서 찍었던 사진이 남아있으니 그 여행이 첫 여행일까. 4살이 되던 해에 비행기를 처음 타보았으니 그때가 나의 첫 여행일까. 기억이 조금이라도 더 선명한 초등학교 2학년 때 해외로 출장 가 있던 아빠를 만나기 위해 엄마와 동생, 셋이서 떠났던 여행이 처음일까. 23살, 처음으로 혼자 떠났던 홍콩여행을 첫 여행이라고 해야 할까.
언제가 첫 여행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내게 '여행'은 좋고 싫음을 판단할 수 없는 일상이었다. 어릴 적부터 여행을 즐겼던 아빠를 따라다니다 보니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게 여행은 생활이 되었다. 마치 습관처럼 하던 일을 하지 않으면 이상하듯이 대학생이 되어서도 나는 여행이 왜 좋은지도 모르고 방학마다 떠날 기회를 틈틈이 노렸다. 처음에는 내가 책에서 혹은 인터넷에서 보았던 장소에 실제로 가보는 것에 의의를 두었었다. 새로운 곳에 내 발자국을 남긴다는 것이 마치 나의 영역을 넓히는 것 같은 기분에 뿌듯했다.
기본적으로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 여행은 아주 좋은 취미였다. 그렇게 여행이 내게 가장 익숙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다보니 결국 ‘관광’이라는 분야에서 직업을 선택했고, 지금도 나름대로 여행을 업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내가 진심으로 여행을 좋아하는지 자문한다면 나도 사실 잘 모르겠다. 작년에 일을 그만두고 오랜 로망이었던 세계여행을 떠났지만, 사실 ‘여행’ 그 자체가 좋았다기보다는 떠남이 좋았고 새로움이 좋았다. 끝이 정해지지 않은 세계여행을 하면서는 조금이라도 지루하다 느껴질 때 얼마든지 다른 곳을 찾아갈 수 있었고, 피곤하면 쉴 수 있었다. 원할 때마다 이동을 하면서 새로움에 대한 갈증 역시 얼마든지 충족시킬 수 있다. 그렇게 260일을 떠돌다 체력적인 한계를 느꼈을 때 집으로 돌아왔다.
귀국을 한 후에는 세계여행을 했다는 이유로 여행 강연이 들어오고, 주변에서 여행 상담이 늘었다. 문제는 어디를 가면 좋은지, 어떻게 가면 좋은지 묻는 사람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 딱히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개인이 좋아하는 것이 다르고, 여행은 날씨나 시기 혹은 우연한 상황에 따라 누구에게나 천차만별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경험한 여행만이 정석인 것처럼 남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어떤 여행은 잘한 여행이고, 어떤 여행은 잘못한 여행이라는 평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행은 모두 각자 마음이 동하는 대로 직접 경험하고 생각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에 아빠와 함께한 네팔 여행은 참으로 특별하다. 아빠와 나, 둘이서 고민하고, 선택하고, 마음이 가는 대로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잊을만하면 언제든 다시 꺼내놓고 함께 깔깔 웃을 수 있는 평생의 추억을 만들었다.
얼마 전 여행 강연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연세가 지긋하신 분께서 미소를 지으면서 이런 말을 하셨다.
“인생이 여행이야. 오늘도 여행이고, 내일도 여행이야.”
2시간을 나의 여행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나왔음에도 그 말 한 마디에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 이상 여행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네팔을 가고, 강연을 하러 전국각지를 다니고, 심심해서 집 앞 놀이터를 나가는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이 새로움으로 떠나는 여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순간 중 언제 다시 곱씹어도 행복했다 말할 수 있는 순간들이 바로 진정한 여행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