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꿈이 아주 사소한 꿈일지라도
18년 전, 10살, 9살인 아이 둘과 아내와 함께 배낭여행 중에 찾았던 네팔 포카라에서는 설산을 볼 수 없었다. 인터넷도 없었고, 최신 정보라고는 영문판 론리플래닛 밖에 없었던 그 때는 여름에는 구름이 많아 설산을 못 본다는 사실을 포카라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았다. 그 때 포카라를 떠나면서 날씨 좋은 계절에 다시 찾아 안나푸르나 설산을 보겠다는 꿈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 지금 청명한 가을에 딸과 함께 이곳에 왔다. 18년 전 담아두었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안나푸르나의 설산을 더 가까이서 보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안나푸르나베이스캠프(해발 4,130m)나 푼힐전망대(3,150m)까지 가볼 생각도 했지만, 그저 그 때 보지 못해 아쉬웠던 마음을 여유롭게 천천히 달래고 싶었다. 그래서 특별한 허가증이나 가이드 동행 없이도 충분히 산책하듯 다녀올 수 있는 담푸스와 오스트레일리아 캠프 루트를 택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루트 중 가장 짧고 쉬운 코스라고 한다.
첫 날은 담푸스까지 2시간 정도의 트레킹을 마치고 설산이 보이는 게스트하우스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쉽게 말을 걸고 대화를 한다. 모두가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동질감이 마음을 쉽게 열게 하는 것이리라. 영국 여행자들과 함께 안나푸르나베이스캠프에서 내려오는 길이라는 가이드 테즈(Tes)와 이야기를 나눴다. 유명한 고르카 용병의 후예라는 그는 두 달 뒤에 한국에 일하러 간다면서 한국에서 온 우리를 정말 반가워했다. 고르카 용병은 영국군이 인도를 점령했을 시절부터 아직까지도 유지하고 있는 군대이다. 용맹하기로 이름난 고르카 족을 대상으로 25kg의 짐을 지고 산길 6km를 30분 내에 주파하는 시험 등을 치르는데 7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해야만 영국군으로 편입될 수 있다고 한다. 산에서 태어나고 산에서 자라 폐활량과 기초체력이 남다른 그들이지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테스는 본인이 올해 네팔에서 한국으로 일을 하러 가는 8,000명 중 한 명이라고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그는 한국에서 일하며 큰돈을 벌어 5년 후에는 고국으로 돌아와 게스트하우스나 음식점을 인수하여 자신의 가정을 일으킬 꿈에 부풀어 있었다.
아들이 재수하던 시절, 나는 진로를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아들에게 물었다. “너는 무엇이 되고 싶니? 대체 네 꿈은 무엇이니?” 아들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대학생.” 한 대 얻어맞은 기분으로 나 자신을 돌아봤다. 고등학교 시절, 나의 꿈은 무엇이었는가?
고등학교 시절 내 꿈은 ‘독립’이었다. 집을 떠나 홀로서기를 하고 싶었다. 중학년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새어머니를 맞았다. 아무리 훌륭한 새어머니라도 사춘기 소년에게 좋을 수는 없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공부만 열심히 하면 네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런 줄 알았다. 의대와 공대를 선택해야 했을 때, 끔찍했던 중학교 생물시간의 개구리해부가 생각났다. 그래서 공대를 택했다. 전자공학이나 기계공학 중에 전공을 선택하라는 아버지의 조언에 물리의 역학을 그나마 가장 재미있어했기에 기계공학을 선택했다. 대학시절이 끝나갈 때 군복무를 해결하기 위해 방위산업체에 근무를 하거나, 석사과정에 진학을 해야 했다. 그때도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별 마음에 없던 석사진학을 선택했고 바로 박사과정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학창시절 내내 바라던 독립이라는 꿈은 내 의지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조언으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이루어졌다.
독립을 하여 내 가족이 생긴 후에는 ‘좋은 아빠’가 되겠다는 꿈을 꾸며 살았다. 이제는 아이들이 자라서 독립을 할 나이가 되었으니 더 이상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던 꿈은 예전만큼 의미 있지가 않다.
얼마 전 올해 환갑을 맞는 친한 선배들에게 물었다.
“올해 환갑이네. 환갑인데 뭐할 거야?”
두 선배 모두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며 별 계획이 없단다.
“아니, 환갑인데 아무 계획이 없다는 거야? 뭔가를 기념해야지. 기억에 남을 수 있게.”
나의 다그침에 수세에 몰렸던 선배가 반격을 했다.
“그럼 넌 뭐할 것인데?“
”나야 아직 3년 남았으니 생각해 봐야지.”
그리고 한 달 고민하다가 생각해 냈다. 요즘 내가 꾸는 꿈은 ‘환갑이 되면 경치 좋은 곳에서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것’이다. 안나푸르나의 설산을 보는 꿈은 18년 만에 이루었지만, 스카이다이빙은 3년 뒤에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설렌다. 나이가 들수록 꿈이 점점 소박해짐을 느낀다. 만 88세인 아버지가 동네 한 바퀴 산보하고 평양냉면 한 그릇 먹고 오는 것이 매일의 소망이듯이 나이가 들수록 나의 꿈도 점점 작아진다.
네팔에서 만난 가이드 테즈가 고향으로 돌아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꿈을 꾸고, 대학입시를 앞둔 아들이 대학생이 되는 꿈을 꾸듯이, 나 역시 환갑에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꿈을 꾼다. 평생을 바칠 꿈을 꾼다면 좋겠지만, 되고 싶은, 하고 싶은, 갖고 싶은 것을 사소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꾸는 꿈 또한 내 인생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 앉아있는 딸은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궁금했다.
“지민아, 너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니?”
“지민아, 너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니?”
세계여행을 다녀와 인터뷰를 하고 강연을 하면서 앞으로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많이 들었다. 항상 듣는 질문이니 항상 하는 답이 있다. 나의 꿈은 ‘더욱 매력적인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보탬이 되는 것’이다. 이 말 한 마디를 만드는데 참 오래 걸렸다. 답을 할 때 ‘보탬이 되고 싶다’를 꼭 넣는 이유는 이 생각을 하면 설레지만 이것만을 위해 살고 싶은 것은 아니며, 너무나 하고 싶지만 절대로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꿈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고, 평생 정답은 없는 일이다. 지금은 이렇게 대답하지만, 내일은 또 어떤 대답을 하게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인터뷰에서 묻는 꿈과 아빠가 지금 내게 묻는 꿈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내게 그런 거창한 꿈을 묻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묻고 있었다. 멋진 대답을 하고 싶었으나 아빠의 ‘지금’이라는 말에 딱히 그럴싸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나는 꿈이 많은 아이였다. 꿈이라기보다는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당장이라도 실행해야지만 직성이 풀렸다. 항상 먹고 싶은 것도 많았고, 태권도도 배우고 싶고, 연극도 하고 싶다며 엄마를 괴롭혔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는 대학생이 되자 하고 싶은 것은 더 많아졌다. 춤추고 싶어서 댄스동아리를 했고, 여행을 가고 싶어서 해외 교류 프로그램에 지원을 하고, 중국어를 배우고 싶어서 중국어 부전공을 했다.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교환학생 도중 듣고 싶은 수업의 교수님을 찾아가 청강을 하게 되면서 관광과 인연을 맺었다. 관심을 가지다보니 더 알고 싶어서 인턴을 하고, 알바를 하고, 유학을 결심했다. 그렇게 셀 수 없이 많은 다양한 욕구들을 이뤄나가는 과정 속에서 수없이 많은 좌절과 성취를 경험할 수 있었다.
유학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더 넓은 세상에서 배우고 싶은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저 혼자 외국생활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에서 온 친구들과 토론하고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대학원 입학을 준비했고, 다행히 장학금을 받아 떠날 수 있었다. 외국에서의 학교생활과 직장생활을 꿈꾸었기에 공부도 하고 현지 회사에서 인턴도 하면서 나름대로 꿈을 이루었지만, 막상 꿈꾸던 환경에서는 가족의 품이 그리웠고, 외로웠다. 그렇게 첫 번째 이루었던 꿈을 떠났다.
서울시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도 꿈만 같았다. 주변에는 내가 평생 꿈꾸던 직장이라고 소개했고, 자부하면서 출퇴근을 했다. 막연하게 나라를 위한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는데 공무원이 되어 그 꿈을 이루었고, 무엇보다 내가 그동안 학생으로서 준비했던 것들을 적극 활용할 수 있는 직장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엔 진짜 꿈을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꿈꾸던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나는 만족하지 못했다. 더 많은 것이 보였고, 더 많은 것이 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또 한 번 꿈을 떠났다.
세계여행 역시 내게는 꿈만 같은 일이었다. 평생 간직해온 로망이 실현되는 순간이었고, 과연 만날 수 있을까 싶었던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그러한 여행이 일상이 되었을 때는 평생 이렇게 길 위에서만 살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꿈을 떠났고, 지금은 ‘프리랜서’라는 또 다른 꿈속에서 살고 있다. 내 업무를 내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프리랜서가 되면 미래의 내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엄마가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시작했던 꿈이었다.
나의 지난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나는 그저 크고 작은 욕구에 충실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그렇게 수많은 욕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다보니 어느 새 나는 끊임없이 꿈속에서, 또 다른 꿈을 꾸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꿈을 꾸며 매일매일 설레는 삶을 살고 싶어서 나는 오늘도 나의 크고 작은 욕구들에 충실하고 싶다.
꿈에 대해 고민을 하다 머리를 식힐 겸 오랜만에 요즘 빠져있었던 게임, 프렌즈팝을 켰다. 프렌즈팝에서는 다섯 개의 블록을 한 줄로 만들었을 때 황금콘이 나온다. 황금콘은 어떤 블록이라도 내가 원하는 블록으로 바꾸어 왕창 터뜨릴 수 있다. 나의 작은 욕구, 꿈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작은 일들을 성취하면서 하나씩 모으고 모으며 살다보니, 언젠가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실제로 꿈꾸던 일이 이루어진다. 어느 순간, 내 인생의 황금콘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루어진다고 끝이 아니다. 블록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나는 또 다음 황금콘을 기다리게 된다. 꿈은 그렇게 차곡차곡 쌓이기도, 그리고 가끔은 마법 같은 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네팔 트레킹에서 만났던 가이드 테즈의 반짝이는 눈빛에 나까지 설렜던 건 그가 한국에서 만날 황금콘이 내게도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수 없이 많은 성취와 좌절을 겪더라도, 결국은 테즈만의 황금콘을 만들어서 돌아올 그의 미래가 내게도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너의 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 ‘보탬이 되고 싶다’라는 수동적인 어미를 붙인 것은 언젠가는 분명 내게 그것보다 중요한 꿈이 생길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빠가 내게 던진 ‘지금의 꿈’에 대한 질문의 솔직한 답은 좋은 사람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빠의 꿈이 ‘좋은 아빠’였던 시절이 있었듯이, 나도 이제는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나보다. 아빠의 질문에 조심스럽게 대답을 했다.
“나는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