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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랑비탈 Nov 04. 2015

눈 길 - 고은

아들, 요 근래부터 시를 한편씩 외우고 있어.

 고등학교 때 고은 시인의 '눈길'을 좋아했는데,  그땐 그저 시험문제로만 생각해서 그냥 흘려버렸었네..

이제야 아빠가 좋아하는 이 시를 외워서, 아들에게 들려주니 뿌듯해. 

아빠의 중저음 목소리가 아이의 뇌 발달에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해서 책을 옆에 두고 보면서 읽어주곤 했는데, 두손으로 안으면서 책장을 넘기는 게 쉽지 않더라고. 그래서 외워서 들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놀아달라고 하는 것인지 말똥말똥 쳐다보는 아들에게, 어떤 때는 시를 읊어주었다가, 어떤 때는 논어 한 구절을 읽고, 어떤 때는 노래 한 소절을 부르며 5개월 채 안된 아들에게 나름 '교육'을 하고 있어.

 아들 덕분에 생각 없이 흘려 보냈던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로 돌아가서 다시 공부를 하는 듯한 느낌이야.


고요한 밤 한 겨울에 가끔 이 시가 생각 나곤 했어. 

모두가 곤히 잠든 밤, 창문을 열고 찬 기운을 맞으며, 집 앞 가로등 불빛 사이로 말없이 내리는 함박눈을 혼자 보고 있노라면  마음속 한 구석이 알싸해지며, 그 어떤 설렘이 부풀곤 했어. 


곧 다가올 겨울 밤, 엄마랑 우리 아들과 그 광경을 함께 보고 싶어.



눈 길 - 고은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의 고백.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를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120日 아들과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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