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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보라 Apr 13. 2022

또 만나자. 그리고 자주 보자.


시원한 곳에서 나와서 내 몸에는 방울방울 물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보통은 초록이네가 첫 주인공으로 출발했는데, 오늘은 어쩌다 내가 되었다.


매번 내가 등장하는 자리는 언제나 비슷비슷하다.

알록달록한 반찬들과 가운데 숯불 그리고 테이블의 진짜 주인공은 남녀 커플이었다.

테이블에 올라갈 적마다 기도한다. 제발 바로 날 오픈해 줘!

테이블에 막 등장한 후 시원한 상태에 바로 뚜껑이 오픈이 되면 나 역시 기분 좋은 시작이다.

하지만 테이블에서 한동안 기다리다 물이 줄줄 흐르고 있을 때 그들에게 뚜껑을 열게 되면 내 마음은 조금 슬프다.

더 맛있는 맛으로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지만, 내 생각과 달리 사람들은 오픈을 다 다른 타이밍에 한다.

내가 극적으로 전환시킬 수도 없고 해서 체념한 지 오래지만 말이다.


오늘 만난 커플의 표정을 보니 여자가 조금 화가 나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예전에 여자가 좋아했던 나를 주문한 것이었다.


오픈한 내 몸에서 매화의 향기가 아주 향기롭게 나서 나 역시 취하게 됐다.

이럴 때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야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기억해 친구들을 만났을 때 나도 대화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매화의 향에 취해 내 몸에 물기가 줄줄 흐르고 내게 붙은 라벨이 떼어졌는지도 모르게 나도 취해버리기 때문이다. 또, 테이블에서 엿듣는 이들의 사연에 대한 기억도 완전히 사라져 친구들을 만났을 때 핀잔을 듣기 바쁘다. 왜냐면 우리는 언제나 인간들 사연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매화 향이 좋아도 정신 바짝 차리고 다시 테이블에 집중해 보니.

남자는 고기에 대해 좀 아는 사람인가 보다.

여자가 이 부위는 뭐냐고 묻자 남자는 고기 전문가인지 아주 술술 쉽게 대답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미디엄으로 구워 이 부위는 이럴 때 먹어야 한다면 얼른 익힌 고기를 넘겨주었다.

그러자 여자는 고기 먹을 때는 원래 그랬던 것처럼 그제야 젓가락을 들어 남자에게 건네받은 고기를 아주 능숙하게 한입에 넣으며 바로 반응을 해줬다.

"와. 정말 사르르 녹는다. 진짜 맛있다. 자기도 얼른 먹어."

방금 전 뭔가 썰렁한 분위기가 이 고기 한 점으로 녹아내린 것인지, 아니면 내가 내어준 술 한 잔에 그런 것인지 분위기가 금세 묘하다.


그 말에 한결 긴장이 풀린 남자는 바로 대답해 준다.

"오늘 고기 상태가 좋네. 이 부위는 이렇게 먹어야 진짜 맛있는 거야. 나도 먹어 봐야지."

그는 빠른 손놀림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고기를 한 점 입에 넣었다.

인간들이 맛있는 고기를 먹을 때 짓는 표정은 거의 비슷한 것 같다.

미간 가운데를 찡그리며 화가 난듯하지만 너무 맛있어서 미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 엄지 척이나 양손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기 때문이다. 나도 언제나 상상한다. 고기의 맛을.


이들은 어쩌다 오늘 나를 만나게 된 걸까.


남자가 먼저 말을 이어갔다.

"요즘 자기 뭔가 답답한 게 있는 것 같아. 평소 하는 말과 별반 다를 게 없는데 왜 그렇게 날카롭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라고 말을 시작하자 여자는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시작했다.


"내가 그 사람과 통화한 후, 바로 자기가 말했지. 친구랑 통화하는 것처럼 친하게 통화할 수도 있잖아. 너무 사무적인 거 아냐라고 했잖아. 사실 그 사람은 당신 친구야. 나는 당신을 통해서 그 친구를 알게 된 사이잖아.

그런데 내가 왜 남편을 앞에 두고 평소답지 않게 행동해야 해? 그 사람과 친절하게 통화를 했으면 한다는 자기가 오히려 이해가 안 되는데? 그리고 그 사람도 내 성격이랑 비슷하잖아. 별말 없는데 괜히 전화기 들고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그러자 남자가 또 말했다.

"그 부분은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 건 분명해. 당연히 이상하게 느껴졌을 거야.. 미안해. 이 부분은 확실히 내가 미안해. 그런데 요즘 자기가 계속 그래. 내가 하는 말에 계속 날카롭게 반응한다고 해야 하나. "


여자가 한 잔을 시원하게 마시더니 나를 가볍게 쥐고 새로 잔을 채우면서 말했다.

"자기가 생일을 중시 여기지 않는 건 아는데 이번 생일에 엄마가 미역국 안 끓여줬으면 난 미역국도 못 먹고 지나갔을 거야. 오죽하면 내가 생일 케이크라도 사야 하는 거 아니냐고 자기한테 말한 거잖아. 평소에 다른 눈치는 엄청 빠르면서 왜 생일 때마다 더 눈치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거야. 난 그냥 속상했고, 그 후 그동안 마음에 쌓아둔 일들이 차곡차곡 더 기억에 나고 어디 놀러 갈 수도 없고.. 하니 기분이 너무 안 좋았어. 그리고 요즘 뭔가 재미가 없어. 다시 권태가 찾아온 것처럼."


이후 남자는 차분한 표정으로 여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는 계획한 일이 진행이 잘 되면 잘 되는대로 스트레스받잖아. 즐기지 못하고, 숙제를 기한 전에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계획한 일이 무산되면 다른 일을 하려고 또 계획하는데 그 계획이 세워지기 전에 쉬는 틈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그 틈에도 스트레스를 받잖아. 그 사이 마음을 풀면서 여유를 찾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선 한 가지 서운한 일로 나에게 이런 상황이 다 네 탓이야라는 식으로 나를 대하잖아.

자기는 너무 욕심도 많고, 완벽을 추구해. 그러니 본인에게 스트레스를 본인이 더 주는 거야. 생일 제대로 못 챙긴 건 나는 매번 말하지만 생일이 뭐가 중요하다는 거지.. 하지만 서운했다면 사과할게. 미안합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의 빈 잔을 채워준다. 방금 전 나를 잡았던 손보다 좀 더 부드러움이 느껴진 것 같은 건 내 기분 탓인가. 그리고 여자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맞아. 요즘 좀 많이 답답해. 어디 여행을 다녀온 것도 아니고 시작하려던 일이 다 무산되어 버리고, 뭔가 엉망이 되어버린 것 같고, 내가 그나마 성실함까지 잃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나를 더 답답하게 만들었나 봐. 오늘은 운동 쉬어야겠다. ㅎㅎㅎ 미안해. 아까 별말도 아닌데 날카롭게 대해서.. 근데 생일은 제발 난 중요하니 좀 챙겨줄래."


남자는 그제야 얼굴의 그늘이 사라진 듯 보였다. 편안한 얼굴로 잔을 비우고 채우며 말했다.

"자기가 요즘 많이 예민해. 조금만 자기를 내려놔. 아니면 다른 취미를 찾아봐. 좀 더 활동적인 걸로. 그림 수업이 딱 좋았는데 그게 폐강돼서 그랬지만.."


여자가 고기를 먹으며 작은 폰을 펼쳐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자기야. 나 작년 이날 블로그에 올린 글도 지금과 똑같은 고민이었어. 소름 돋는다. 나 이거 생리주기처럼 패턴인 건가.. 자기한테 많이 미안하네.. ㅋㅋㅋㅋ"


여자가 폰을 건네주자 남자는 받아서 그 폰을 한참 확인하더니 큰소리로 웃었다.

"그래. 내가 자기 성격 받아주다 늙어 죽겠다. 작년에도 이랬네!! 구글로 몇 년 전 이맘때 사진이라고 보면 3월 초 거의 비슷한 목적으로 여행 다니고 했어. 그러다 진짜 코로나 어쩌고 하면서 못 다녀서 최근 사진이 없지. 그래서 자기가 이러는 건가.. 정말 이런 것도 일관적이다. 진짜. 내 여자지만 정말 대단해."


둘의 분위기가 처음 내가 테이블에 앉았을 때 느꼈던 둘 사이의 냉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나를 다 비워내고, 또 내 동료 매실주를 테이블로 불렀다.

나 역시 혼자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다른 동료가 와서 함께 하니 마음이 좋았다.

가끔 나 혼자 혼술 하는 테이블에 앉아있을 때는 나 역시 그 테이블의 주인공과 같이 마음이 허전하다.

그런데 이렇게 둘 이상이 모이면 그 테이블의 분위기도 타지만 내 옆 친구가 있다는 것에 마음은 한결 흥겨워진다.


새로 옆에 자리 잡은 친구에게 말해줬다.

<내가 냉한 분위기 달래 놓았으니 아주 달달하게 이 커플을 적셔줘.>

그러자 옆 친구가 내게 윙크를 건네며 말했다.

<걱정 마. 우리가 품은 이 매실주는 달달하게 만드는 데 선수잖아.>




오늘 저녁 함께한 이 테이블 분위기가 끝나간다.

주문한 고기는 다 먹었고 아직 혈기 왕성한 숯이 혼자 열을 내고 있다.

그러자 여자의 얼굴도 함께 달아오른 것처럼 보였다.


오늘 나와 내 친구는 우리의 몫을 다 했다.

이 테이블을 끝으로 우리는 한동안 공장에서 새 단장을 하고 나오겠지만 그때 다시 마주할 테이블도 오늘같이 기분 좋게 마무리하는 분위기면 좋겠다.


그리고 그대들은 날 기억하지 모르겠지만, 행복하게 잘 살아요.

옆에 누군가 있을 때가 행복한 거예요.

나도 항상 옆에는 동료가 있어주길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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