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William Godward
13년 6개월 만에 최고치를 경신하며 장중 1,430원을 뛰어넘은 원달러 환율. 시작된 금리 슈퍼위크 앞에서 자이언트 스텝이 연잇는 화려한 혼돈의 시절. 가만히 이 시간들을 통과하며 엉뚱한 생각을 문득 떠올리고 만다. 상황이 내 마음 같지 않다고 그만둘 수 없는 게 바로 인생이라는 것에 대해서. 그렇다. 우리는 멈출 순 없다.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것이 단 한 번뿐인 인생에 대한 예의. 그런데 그 예의를 지키다가 나도 모르게 자꾸만 생각의 늪에 빠지고 만다. 물론 그것은 스스로를 향한 일종의 경각심을 자극하는 시그널이기도 할 테지만.
인생은 디폴트 옵션이 될 수 없다. 자신을 잃지 않고 싶은 인간은 더더욱 그러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선택의 기로 앞에서 되도록 '나 다운' 선택을 하려 애쓴다. 자신의 의사결정과 순간의 선택들에 의해 인생이 바뀌는 전곡점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 그런데 선택은 본디 쉽지 않다. 더군다나 합리적일 수 없는 인간이 그럼에도 되도록 합리적 의사결정을 하려 한다면 이겨내야 한다. 자신의 편향성과 이기심을. 인간이란 무릇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아간다. 또한 내가 틀렸다는 걸 그리 호락호락하게 허락할 수 없는 이기적 유전자를 지닌 존재다. 그러니 무지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생각하려 애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유'라는 '의식'을 지니지 못한 인간은 한낱 '살아있는 고깃덩어리' 일 수 있을 테니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나는 도대체 무엇을 발화 혹은 발설하고 싶었기에 새벽 점심 저녁의 러닝머신 위에서 흠뻑 땀 흘리며 뛰면서도 이런 단상들로 점철된 생각에 잠겼을까. 요즘은 도무지가 생각의 감각이 예전보다 더욱 날카로워졌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그리움이라는 기억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말기 때문인 걸까. 기어코 절대로 놓치지 않고 싶은 한 시절의 기억. 그 기억에 중독된 채 살아가는 중이라는 걸 은은히 감지하기 때문일까. 무모하게도.
18세기 영국의 신고전주의 화가였던 존 윌리엄 고드워드는 그 만의 섬세하고도 독특한 사물 묘사로 유명하다. 화폭 속 주인공들은 주로 고전풍 드레스를 입은 아름답고도 매혹적인 여성들이다. 인물 주변 풍경으론 밝은 색감이 도드라지는 자연과 바다가 배경이 되어 대리석에 앉은 모습이라든지 동물의 가죽 위에 엎드리거나 그것을 걸친 그녀들이 주로 그려진다. 화가에 대해 사실적 상세 기록은 쉽게 찾아볼 수 없었지만 다만 그에 대한 미스터리적 구전설화는 도리어 사실관계가 감춰졌기에 전해지는 에피소드들로 하여금 어떤 서사와 상상을 자극하고 만다. 사회적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부모의 간섭이 심해서 자유롭게 미술과 예술을 공식적으로 행할 수 없었던 그는 밀실 공포증 증세가 있었다 한다. 생의 말미엔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도무지 우울감이나 고통이 느껴지지 않은 그의 작품들이 처음엔 믿을 수 없이 느껴지지만 자세히 살펴보며 생각을 하면 매혹적 색감에 감춰진 어떤 애달픈 측은함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아름다움과 우아한 나른함이 잘 담긴 그의 그림들은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인물들을 부쩍 떠올리게 한다. 'The Signal' 속 여성은 대리석 위에 위태롭게 앉아 햇빛을 가리면서 어딘가를 직시하는 중이다.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기다리는 것 혹은 기대하는 것, 아니면 그 두 가지가 아닌 그저 먼바다를 등지고 앉아 있는 그 시간의 자신의 직감에 따라 움직이는 중일까. 무엇이든 그녀의 의식은 잠들어 있지 않겠다. 깨어 있는 인간의 것이겠다. 또렷하게 뜬 눈, 위태로운 듯 한 손으로 대리석을 잡고 한 손으로 햇빛의 뜨거움을 가리면서도 열정적으로 어딘가를 직시하는 그녀의 모습은 선명하고 확실해 보인다.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속살이 비치는 연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여성은 부드러워 보이는 호랑이 가죽 위에 누워 한낮의 호사처럼 사치스러운 여유를 부리는 중이다. 그 어떤 것도 그녀를 방해할 순 없어 보인다. 맨 발의 한껏 흐트러진 태도와 자세로, 감았는지 떴는지 알 수 없는 그녀의 눈은 손가락 위에 다소곳하게 그녀를 향해 날아온 새를 향한다. 해방과 자유의 강렬한 한 때를 만끽하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 방만해서 어딘지 모르게 나로 하여금 불편한 시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무방비상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인가. 위험하진 않을까, 두렵지는 않은지. 그러다 생각은 결국 나를 속이지 못하고 만다. 안전을 포기한 인간은 불안할지언정 그제야 진정한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는 것임을. 진실에 다가갈수록 불편하더라도 그 진실이 결국 한 인간으로 하여금 정직한 해방을 맞이하게 해 줄 수도 있음을. 꾸며지고 설정된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진짜 자신에 다가갈 수 있음을. 그리하여 화폭 속 그녀와 손 끝의 새는 닮았다. 무모하더라도 그럴 수 있는 용기로 자기 자신만의 날갯짓을 할 때. 비로소 어느 방향으로든 갈 수 있는 그 경이로움을 만끽하게 될 것임을.
새벽에 일어나 30분을 격렬히 뛰고 난 후 급히 샤워를 하고 집으로 복귀하여 그이의 출근을 배웅한다. 그 후 아이들과 함께 등원과 출근, 퇴근과 하원을 일삼고 주말엔 선재도로 아이들과 갯벌체험을 하러 가거나 마트에 장을 보러 가거나 부모님을 뵈러 가거나 하는 식의, 그런 생활적 계획들을 나도 모르게 세우고 있는 생활의 연속선상 속에서도.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기억의 감각은 괜히 심장을 진동시킨다. 기억의 중심점에는 없어질 뻔한 '자아'가 존재한다. 흐려져서 잊고 있던, 그리하여 어느새 생경해졌지만 분명 소실되지 않은 '나'라는 자아의 니즈가, 무모할 용기가 충분했던 한 시절의 빛나던 '나'에 대한 그리움은 그렇게 재생되었다가 조용히 사라진다.
전두엽에서 흐르는 없어지지 않은 기억과 의식의 파장이 자꾸 나로선 어떤 중독성 강한 '상상'을 자극하고 만다. 그것은 마치 수면 위로 드러내지 못하는 은은한 내적 열망이 되어 결국 길티 플레저를 찾아 헤매는 빈곤한 생각까지 닿고 만다. 생각의 해독제를 찾지 못한 채 늪에 빠진 기분과 조우하다가 끝내 우스꽝스럽게도 괜히 뇌 탓을 한다. 부디 나의 해마가 '우리' 로서의 시간들을 오래 기억하기를. 기억의 적이 시간이라면 어떤 시간들을 견디게 만들어 주는 것 또한 다름 아닌 바로 기억들일 테니까. 무모하지만 그래서 좋았던. 언젠가 우리가 적당히 어긋나서 서로의 스텝이 뒤엉켜 넘어질지라도. 우리라는 무대 위의 춤은 계속될 것임을 내가 기억할 것이라는 걸. 상대가 기억하지 못할지언정.
화가의 또 다른 그림인 'When the heart is young'에서도 동물 가죽 위에 엎드린 젊은 미색을 자랑하는 여성이 등장한다. 한낮의 잠에서 깨어난 것일까 아니면 이제 막 수면에 빠져 들려는 찰나였을까. 그녀의 시선은 정면을 향하며 자신의 에로스와 매혹을 조용히 과시하는 중인 것도 같지만. 한편 내 눈에는 그녀가 어딘지 모르게 누군가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니라 공허하게 어떤 생각의 늪에 잠겨 있는 것만 같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지닌 심장의 젊음은 여전해도 정작 자신의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을 망각한, 무게 중심점을 잃고 있는 자신을 찾으려는 연약하고 불안한 시선으로 보인다. 그녀의 에로스는 정녕 살아있을까. 본디 에로스란 기득이나 이득과는 별 상관없는 세계에 속하듯, 사랑을 나누는 그 시간만큼은 자신을 확실히 버릴 줄 알아야 할 텐데. 그뿐일까. 스스로를 분명 소진하고 소비하고 때로 상처 입을 위험을 감수하면서 낭비까지도 일삼을 위험을 감수해야 할 테지만. 쓸모를 따지는 시대에 무쓸모한 낭비와 무모하기에 더더욱 다칠 위험을 감수할 에로스적 용기는 한 인간에의 시간과 생활에 그렇게 묻힌 채 점점 멀어져 가는 것.
요즘 자주 도리스 레싱과 그녀의 작품 속 수전의 '19호실'을 갈망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지혜의 숲에서 길을 잃어버렸어도 끝내 여정을 계속하다 결국 종이의 고향에 랜딩 할 줄 아는, 무모하지만 자신으로서는 꽤 기특할법한 선택을 떠올리기 때문일 테다. 어떤 상실과 분함과 잡히지 않는 연한 그리움을 나만의 방식으로 되살려보겠다는 의지인지, 아니면 지워지지 않는 우울감을 뜻밖의 무모한 산뜻함으로 확실히 역전시켜버리고 싶기 때문인 걸까. 그런 의지의 인간에게 비로소 세렌디피티가 다가가는 것이라면. 나는 레싱의 19호실이 그리 먼 곳에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만다. 적당히 흐트러지기 좋은 텅 빈 공간에 남겨지면 그제야 잊힌, 잃었던' 나'와 대면하며 익명으로서의 반가운 자신과 재회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하여 레싱의 19호실에서 탄생되는 시간은 어찌 보면 무모한 선택일 테지만 그래서 자신의 것임을 선언할 수 있는 것이겠다.
이윽고 생활 속에 잠긴 기억은 빗장을 열고 소생된다. 수면 위로 드러난 상상은 새로운 KPI로 은밀히 재탄생된다. MBO가 셋업 되고 그에 맞춰 자기만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킬 것이다. 인생의 어떤 1막이 완전한 엔딩을 맞이하고 새롭게 2막을 시작하는 것처럼. 그것은 누구를 위함이 아닌 바로 자신을 향한 무대가 되기를 소원한다면. 누구든 자신의 제2막 앞에선 늦지 않았겠다. 도리어 생의 윤택함으로 자기 자신을 인도하기 위해 무모한 결심을 행하는 인간의 제2막은 여러 형태의 자신만의 북극성 지표들로 증명될 것이다. 예컨대 나로서는 계좌 속 정량적 숫자들의 증폭. 우상향의 의지가 강렬한 커리어력. 지적 허영이 도가 지나치지만 그렇게 쌓여가는 여러 형태의 지력. 날렵한 침묵으로 다져진 밀도 높은 정신력. 그리고 노르아드레날린과 에스트로겐과 그로 인한 세로토닌과 도파민은 여전히 활성화된 상태에서 기민하게 관리되는 육체라는 자원. 누가 알까. 그것들이 언젠가 제2막에 어울리는 나만의 탁월한 무기가 되어줄지도. 여러모로. 확실하게.
어떤 일을 겪은 후엔 또 다른 시간이 다가온다. 불완전하고 불안한 자신과 완벽한 작별인사를 나눈 후.
무모할 수 있는 시간은 열린다. 제 2막은 그렇게 시작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Source : John william godward, Art
https://en.wikipedia.org/wiki/John_William_Godw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