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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미 Sep 22. 2019

조금은 나아진다.

‘앙코르 왓 스몰 투어’를 신청했다. 며칠째 호텔 수영장에서 뒹굴대는 내게 호텔 직원들이 ‘오늘은 무슨 계획이 있어?’라고 자꾸만 물어보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귀찮기만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앙코르왓이 예전처럼 잘 있는지 눈도장은 찍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투어 예약을 하고는 드디어 ‘오늘은 사원 다녀왔어?’하고 물어보는 친절한 친구에게 ‘내일 갈 거야’라고 당당하게(!) 대답해 줄 수 있었다.


그래 놓고 당일 아침에는 너무 귀찮아져서 여행사에서 픽업 오면 안 간다고 말할까 몇 번을 고민했다. 전날 잠을 설쳐서 라는 좋은 핑계가 있지만,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차에 몸을 실어보자 싶기도 하다. 조식으로 나오는 지나치게 진한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마시고 연신 하품을 하며 투어가이드를 기다렸다.


픽업 온 가이드는 매우 퉁명스러워서 가이드가 아닌 줄 알았다. 역시 이래야 캄보디아지, 우리 숙소 직원들은 이상하게도 너무 친절하다 했다. 동남아 남자들이 동양 여자들에게 굳이 더 불친절하고 예의 없이 구는 것은 늘 불쾌한 일이다. 어쨌든 결국에는 친절해지긴 했으니, 이게 다 자본주의 덕분이다. 나중에 조금 친근하게 대했더니, 자기는 이런 일을 할 게 아니었고 원래 비즈니스를 하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서 못한다고 투덜댔다. 이렇게 성의 없이 일하는 가이드도 처음인 듯.


예전의 기억이 너무 강렬했던 탓일까? 그때는 정말 세상에 이런 유적은 다시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앙코르왓이 생각보다 너무 작았다. 그래도 멀리 세 개의 봉우리를 보자 가슴이 저절로 두근댔다. 앙코르왓 건너편 해자에 앉아 있던 내 주변을 둘러싸고는 더듬거리는 영어로 말을 걸었던 아이들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여행자들을 따라다니며 1달러를 외치던 수많은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소홀하다지만 아예 방치하다시피 하던 유적지도 조금씩 관리하는 것 같다. 캄보디아도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

앙코르왓 사원의 꼭대기 층에 올랐다. 우리나라의 사원들과 비슷하게 이곳도 꼭대기층은 천국인 수미산을 상징한다. 혼자서 난간에 앉아 일몰을 기다렸던 기억이 떠올랐는데 마음이 이상하. 인생의 최종 목적지 같았던 대학입시를 성공하고는 공허해진 마음에 영문을 모르며 방황하던 내가 기억난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무엇하나 나아진 것이 없다.


아니, 심지어는 나이도 20살이 더 들었고 살도 훨씬 쪘으며, 여전히(!!) 싱글이다. 예상대로라면 그대로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할 인생은 그 이후에도 수많은 실패와 큰 아픔들이 있었다. 결국은 사람들이 말하던 대로 인생은 그냥 견뎌내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나아진 것이 없는 걸까?


견디고 싶지 않다. 생각해 보면 그건 좀 나아졌구나. 나 자신을 사랑하는건 모르겠지만 나 자신을 좀 덜 생각한다. 남들의 눈도 조금은 덜 신경 쓰고, 낯선 사람들에게도 상냥하려 애쓴다. 인생을 사는 원칙도 두 개나 세웠다. 어쨌든 나아진 게 있다. 나아지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매우 느리게 변했고 아주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20년간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은 것이 아니란  생각을 하니 좀 마음이 안심이 된다.


앞으로 20년은 이것보다는 조금 더 많이 나아져 보도록 해 보자. 더 부지런히 고민하고 생각해 보자. 다시 돌아왔을 때는 지금보다 덜 후회스럽고 조금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때는 누군가와 함께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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